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은 그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표면상 이야기만으로는 그 까닭을 얼른 알 수 없지만 깊이 헤아리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앞부분은 사도 바울 일행이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본격적 선교활동을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고, 뒷부분은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복음을 전함으로써 유럽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선교 역사상 위대한 전환을 전합니다.

본래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자 했습니다(15:36). 그것은 사도가 기왕에 씨를 뿌린 아시아 지역의 공동체를 돌보고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일을 막습니다(16:6)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소아시아, 곧 튀르키예 지역을 뜻합니다.

성령이 가로막자 다시 설정한 경로를 보면 사도 바울이 여전히 아시아 지역 선교에 대한 미련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튀르키예 지역 중부에서 서부를 거쳐 그 서북부로 가려고 했던 행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무시아를 거쳐 드로아에 이릅니다.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입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밤중에 환상을 봅니다. 건너편 마케도니아, 곧 유럽 지역 사람이 나타나 외칩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16:9).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으로 확신하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기로 작정합니다.

이 일련의 사건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자신이 이미 씨앗을 뿌린 공동체를 돌보고 다지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사명을 맡깁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난 사건에 비견됩니다(사도 10장). 그 사건은 선교 대상의 변화를 뜻하지만, 바울에게 일어난 사건은 아예 선교의 새로운 영역이 열린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인도를 받아 사도 바울 일행은 유럽 지역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이튿날 네압볼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빌립보에 이릅니다. 바울의 유럽 지역 첫 선교지인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마케도니아 지역의 첫째가는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며칠 머물면서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강가를 찾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적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방인 지역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처소를 먼저 찾았다는 것은 바울의 초기 선교활동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미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을 때 그 거점은 항상 유대인 회당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이르러서도 같은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회당이 아니라 강가에 있는 기도처였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에 번듯한 회당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기도처가 있다는 것은 소수의 무리이지만 모임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임이 강가에서 이뤄진 것은 정결례를 치르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강가의 기도처에서 바울은 모여든 여자들을 만납니다. 남자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통상 유대인들의 모임은 남자가 10명 정도 모여야 정식 예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강가 기도처의 모임은 정식 예배가 아니라 그저 여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 가운데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어 처음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 여자의 존재도 흥미롭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아니되 유대교와 그 공동체에 우호적이고 또한 함께 협력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그들은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유대인 공동체의 유력한 후원자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종자들이 사회적 신분상으로 대개 낮은 계층에 속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력한 계층에 속했습니다. 본문은 이 여인이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다고 합니다. 두아디라는 튀르키예 지역의 도시로서, 루디아라는 이름은 개인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광의의 지역 이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아디라가 포함된 루디아 지역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자색 옷은 황제를 비롯한 유력한 귀족들이 즐겨 입는 옷입니다. 루디아 여인의 고객들이 유력계층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자주색 옷감 장수였다는 것은 그의 재력과 신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 여인이 바울 일행의 유럽 선교의 처음 열매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묵게 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개별적 정보는 이후에 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의 선교에 의한 유럽 지역에서의 첫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활동에 적지 않은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심에 이 여인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 또한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위대한 전환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새로운 선교 영역에서 주인공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펼쳐지는 역사의 극적인 전환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강고한 가부장적 질서에 매여 있는 기존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울이 소아시아가 아니라 지금의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그 첫 방문지인 빌립보에서 최초의 여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지시하고 있다. ⓒGetty Images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성령, 예수의 영이 가로막은 것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의 인간적 노력이 허사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스스로 예정하고 계획한 범위, 다시 말해 바울 자신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 사건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새로운 선교 영역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주인공들을 만나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는 그 일행이 겪은 모종의 경험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겪은 그 인간적 경험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던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이방 지역 선교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스스로 이방인 지역 출신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소아시아 이방 지역의 유대교 회당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공동체라는 거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신앙의 기본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 신앙의 공감대 위에서 새로운 진실을 일깨우는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복음의 진실을 깨우친 많은 사람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마치 양날의 칼과 같았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 또한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낯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통을 고수하는 이들로부터 실질적인 위협을 겪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이방인 지역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더욱 유리한 이점을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펼치고자 했던 바울은 그런 현실적인 난관 때문에 전적으로 낯선 지역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현실적인 난관에 봉착했을 때 바울에게는 그야말로 낯선 땅이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때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로 접어듭니다.

바울이 서쪽으로 간 까닭,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를 떠나 미지의 낯선 세계로 나서고자 한 데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는 것이요, 세계를 확장하는 길입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기 안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와 통하는 길입니다.

오늘은 3.1절 기념 주일이자 동시에 우리 교회가 젊은이들의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3.1운동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한 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주인이 곧 민중 자신이라는 것을 표방한 역사적 쾌거였습니다. 국권회복운동이자 동시에 민권쟁취운동이었습니다. 만천하에 독립을 선포한 계기이자 동시에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이 되는 계기였습니다.

나아가 그 사건은 모든 나라와 민중들이 이루어야 할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의 숭고한 이념을 만천하에 표방한 역사적 쾌거였습니다. 낡은 시대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이었습니다. 자유를 억압당하는 낡은 세계에서 벗어나 저마다 자유를 구가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숭고한 행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손길로 받아들이고 헌신하였습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인 남강 이승훈 선생은 머뭇거리는 교회 지도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어?”

그분은 또한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에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이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신앙으로 한국 그리스도인은 3.1운동에서 헌신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2천만 명이 채 되지 않은 인구 가운데 200여만 명이 참여한 사건에서 그리스도인의 참여는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1.5%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인, 전체 피검자의 17.6%, 여성의 경우 압도적인 65.5%, 교회 지도자의 경우 244명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두 배에 달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가진 가시적 조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믿음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당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자유와 해방, 더불어 통합의 상징이었던 태극기가 공화국 헌정질서를 부정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세력의 전유물이 되고, 그 대열의 선두를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끄는 서글픈 현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되묻게 해줍니다. 신앙이 그렇게 닫힌 세계로 인도한다면 그 신앙이 진정한 신앙인지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낯설지만 모두가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숭고한 뜻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특별히 입학과 졸업을 하는 학생들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또 다른 과정에 진입하는 것은 낯선 세계로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낯선 세계를 경험하며 더욱 높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성장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세계를 더욱 확장하며 모두에게 유익을 끼치는 높은 뜻을 이뤄가는 인재들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모두 그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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