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난의 시작

사순절(四旬節, 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절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죠? 이 기간 동안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참회와 금식을 행하며 보내게 됩니다. 이번 사순절기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주제들이 이어집니다. ‘고난→배반→예정→유혹→결백→기억’ 등입니다. 이러한 핵심 키워드로 사순절기 여섯째 주일의 주제가 연결됩니다. 오늘 사순절 첫째주일은 ‘고난’이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감람산 근처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때 제자들과 무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찬양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지만, “이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죠?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쉽게 오지 않습니다. 많은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고 배반과 아픔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이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물론, 따르던 바로 그 무리에 의해 (물론, 빌라도 총독이 최종 완성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 말씀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장면을 소개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을 죽였던(그리고 반성이 없었던) 그 무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도 용서를 베풉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님의 고난의 끝은 역설적으로 부활과 하늘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사는 동안 불의한 권력과 잘못된 제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을 죽이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세본문 말씀으로는 배려와 공감, 사랑과 정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됩니다.

구약 말씀이 그것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노아의 아들 가운데 샘과 야벳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공감과 배려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함은 그러지 못해 저주를 받습니다. 이렇게 비록 고난의 시절이 닥쳐와도 늘 아름다운 성품으로, 부활과 하늘나라를 믿으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눅 19:28-32)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공생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루살렘은 잘 아시다시피, 그 당시 정치와 종교,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입니다. 초기에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변두리 갈릴리와 천지 차이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에 예수님은 로마 군대처럼 군마가 아닌,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고자, 제자 둘을 벳바게로 보내 나귀를 끌어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 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눅 19:33-36)

사람들은 스가랴서에 나오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라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줄 알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자기의 겉옷을 길에 폅니다. 길에 겉옷을 펴는 것은 왕을 영접하는 특별한 예우입니다(예후가 왕이 되었을 때,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참조, 왕하 9:13).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우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37-40)

감람산(올리브산, Mount of Olives)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기드론 계곡(골짜기)을 지나, 황금문(Golden Gate)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의 동쪽 성문 입구가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자, 제자의 온 무리가 “하늘에는 평화요, 지극히 높은 곳(ἐν ὑψίστοις,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영광”이라고 찬양합니다. 깜짝 놀란 바리새인들이 반대하고 막아섭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인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 고난의 길인 예루살렘 가는 길

먼저 종교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는 제자들의 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는 다윗과 같이 (혹은 로마 군대와 같이) 군대를 통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 분이지, 초라한 마귀를 타고 오는 요셉의 아들, 평범한 인간 예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당국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반란 세력으로 간주하고 유대 민족 전체를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이유는 무리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기득권층이었습니다. 만약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틀림없이 자신들의 권위가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찬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종교 기득권이 약화 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올바른 진리의 길을 막아서는 사람은 늘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곧게 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말씀은 이렇게 침묵하지 않고 진리를 당당하게 외쳤던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바로 초대교회 7집사 가운데 한 명인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의 고난을 보여줍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3. 스데반의 순교,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4-58)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행전 6장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7집사를 세우는 말씀입니다. 봉사의 직분을 위해 집사를 세웁니다. 그리고 7장에는 스데반이 공회에서 한 설교와 순교를 다룹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장면입니다. 어떻게 보면 스데반은 집사가 되자마자 얼마 안 되어 공회에 끌려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한 인간의 삶으로 보면 허망합니다. 미쳐 꽃도 피우지 못하고 저문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고난은 이후 나타나는 순교의 첫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스데반의 뒤를 따라 열두 사도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놀라운 것은 스데반을 핍박하는데 함께했던 사울(나중에 사도 바울)도 스데반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위대한 사도로 기독교의 기틀을 잡게 됩니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스테반의 순교> (1616-17)

스데반 집사님의 마지막 음성을 들어볼까요?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드디어 스데반 집사님이 운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마지막 말은 자신을 죽인 이들에게 용서를 베풉니다. 놀랍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고난 가운데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인 스데반을 본, 그 현장에 있었던 사울은 고민을 합니다. 골수 유대교인이었던 그의 변화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물론, 다메섹 도상의 경험은 이 계기의 폭발적 영향입니다). 이렇게 스데반 집사님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어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4. 고난의 민족, 한국인의 탄생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사이에 있어서, 고난이 끝없습니다. 한반도라는 70% 산으로 구성된 척박한 보금자리도 그렇지만,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린 민족입니다. 그러나 잘 아시겠지만, 우리 민족은 이러한 고난을 잘 극복하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恨)을 승화(한풀이)하여 세계가 놀랄 K-문화를 만들어 왔죠? 그렇다면 한국인의 원형을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요?

소설가 홍대선의 『한국인의 탄생: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메디치미디어, 2023)는 한국인이라는 원형(原形)을 만든 세 사람을 단군, 고려 현종, 정도전으로 지목합니다. 그리고 그 키워드를 각각 ‘생존’, ‘전쟁’, ‘혁명’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먼저, 단군은 ‘척박한 보금자리 택한 실책’으로, 곧 부동산 투자 실패로, 고려 현종은 고려-거란 전쟁을 통한 ‘한민족을 실체화’ 시킨 인물로, 마지막으로 정도전은 ‘유교 통치 체제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빚은’ 인물로 소개합니다. 먼저 단군에 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단군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실패했다. 첫째는 자연환경이다.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은 눈으로 보기엔 아름답지만, 몸으로 견디기엔 매우 고통스럽다. 한국보다 더운 곳도 있고, 추운 곳도 있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 안에 한국처럼 극단적인 사계절의 차이가 강요되는 곳은 없다. 한국인은 차이에 고통받지, 절대적인 온도에 고통받는 게 아니다. (중략) 한국인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기후의 극단적인 변화에 매년, 반드시 정기적으로 노출돼왔다. 한반도는 생산력도 절망적이다. 70% 이상이 거칠고 변화무쌍한 산악지형이다. 그렇다고 평지가 풍요로운 것도 아니다. 좁디좁은 평지는 산악지형보다 조금 더 풍요로울 뿐이다. 한반도의 겨울은 추운 사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척박하다.”

단군은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지만, 너무 척박한 땅을 한국인의 보금자리로 선택한 실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계절이 뚜렷해 강산이 아름답지만,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습니다. 게다가 70퍼센트가 산악지형입니다. 따라서 단위면적 당 인구부양력이 가장 높은 작물인 쌀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단군의 실패는 위치 선정입니다. 물론 이웃은 내가 고를 수 없지만, 힘이 센 나라, 중국 옆에 자리한 것도 단군의 실책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은 역사 이래 중국의 숱한 간섭과 침략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인이 여타 민족이나 국가들처럼 중국에 흡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중국은 수시로 침범해 한반도 병탄(倂呑)을 노렸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국은 한국인이 고개를 숙여 주기만 하면 건드리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한국은 왜 오래전에 망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중국의 팽창으로부터 살아남았는가?”를 증명해 줄 인물이 바로 두 번째 인물인 고려 8대 군주 현종입니다. 현종은 한민족 탄생의 일등 공신입니다. 즉위 당시 허수아비 군주였지만,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하늘이 내린 성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대 최강국인 거란과의 싸움은 무려 26년이나 이어졌는데, 이 싸움에는 고려에 흡수되었으나 겉돌던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발해계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그들 서로보다 훨씬 이질적인 적에 맞섰습니다. 귀주에 모여든 20만 명은 함께 고통받았으나 결국 승리한 기억을 안고 고향에 돌아가 온갖 이야기로 풀어냈습니다. 실존하는 허구였던 한민족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홍대선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포스터의 현종(가운데)과 양규 장군의 최후

“공동의 적에 맞서 살아남은 이들은 공동체가 된다.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발해계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그들 서로보다 훨씬 이질적인 적에 맞선 이야기는 생명력을 가진다. 한반도 주민들은 함께 고통받았고 승리의 기억 역시 함께했다. 귀주에 모여든 20만 명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제는 하나가 된 승리와 극복의 서사를 이야기했으리라. 양규의 영웅적 죽음과 하공진의 절개는 전설이 되었으리라. 같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집단이 되었으리라. 현종이 겪은 끔찍한 굴욕과 공포는 모든 고려인이 겪은 고난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말을 탄 귀족들이 평민 보병을 구원하기 위해 돌진한 결과 세계가 구원받았을 때, 그 세계는 ‘우리’가 된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해졌다. 한민족이 탄생했다.”

여기서 양규 장군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홍대선은 양규 장군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양규의 대단함은 단순히 나라를 구했다거나, 누구보다 육중한 활을 다뤘다는 사실, 그가 쏘는 화살이 사거리와 위력에 있어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으리라는 점 따위에 있지 않다. 양규는 국가 정신이 무엇인지를 제시했다. 양규와 그의 군사들은 고려의 평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전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가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충성했다. 하나는 왕조, 하나는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11세기의 중세 전사에게는 비범한 정신 세계인 것이다. 고려왕조 역사에 영웅은 많지만, 그처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영웅은 없다. 그러하기에 현종은 양규가 죽음으로 던진 질문에 정답을 제출해야 하는 숙명에 내던져졌다. ‘국가의 자격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평민(백성)입니다. 오늘날은 국민 혹은 시민이죠? 왕조, 혹은 국가의 존립 이유는 바로 백성인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귀족과 장군들이 목숨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고려의 구성원인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발해계 사람들을 한 무리로 만든 것입니다.

마지막 인물은 정도전입니다. 현종이 한민족의 탄생을 이끌었다면,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정도전입니다. 그는 유교를 기반으로 ‘임금의, 사대부에 의한, 백성을 위한’ 통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한국인의 윤리관, 국가관입니다. 홍대선은 정도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한국인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의 기준에서 독재라는 사실은 자주 간과된다. 태종은 동시대 외국의 군주들은 물론 현대의 독재자들보다도 훨씬 불편한 생활과 많은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그는 왕이 되는 데 성공하고 왕권(王權)이 신권(臣權)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이 세운 나라의 왕이라는 틀 밖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정도전의 조선 설계도면 거의 전부를 물려받았다. 정도전은 공식적으로만 역적이었을 뿐 조선왕조 내내 조선 사대부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무력은 철학자를 죽일 수 있지만, 철학을 이기지는 못한다. ‘왕의 나라’ 조선의 군주는 결국 ‘사대부에 의한 나라’에 갇힌 존귀한 포로였다. 동시에 사대부 역시도 그들 자신에게 부과한 도덕률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특히 정도전의 유교는 효(孝)라는 덕목을 조선의 질서 토대로 굳건히 하여 조선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가정’을 500년 동안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의 유교가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아닙니다. 헤겔의 역사철학을 소개하며 홍대선은 이렇게 꼬집습니다. 

“조선의 건국자들에게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나라를 세웠다는 나르시시즘의 흔적이 보인다. 조선 사대부는 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자신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에 사는 문명인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살았다. 조선 초기의 임금인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1)에서 음양의 이치를 거론하며 가장 완전한 문자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신진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을 단순히 왕가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이 아니라 시대의 전환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 일은 역사 발전이었다. 그들은 타락한 고려를 부정했으면서도, 조선도 언젠가 고려처럼 중환자가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스스로가 ‘역사의 종말’ 즉 더는 발전할 여지가 없는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한 주역이라고 믿었다. 참으로 장대한 포부지만 결과는 오답이었다. 그들의 사명감은 존중하지만 틀린 건 틀린 거다.”

결국 홍대선은 마지막 결어 ‘한국인의 탄생’에서 1945년 이후 빠르게 변하는 한국 사회를 살펴봅니다. 이것은 중앙집권에서 케이팝(K-pop), 민주주의까지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반도의 열등감이 생존전략이자 결국 사회정의가 되는 모순이라고 소개합니다. 

“현재는 미국에서, 과거에는 중국에서 성공한 실험이 한반도에서 완성되는 이 구도는 역사가 깊다. 한국 네티즌은 농담 삼아 미국을 ‘천조국(天祖國)’이라고 부른다. 천조란 중국 황제인 천자의 왕조를 뜻한다. 한국에서 미국 45대(이자 현재는 47대)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별명은 ‘트황상(皇上, 황제 폐하)’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비록 원조보다 규모는 작지만, 대신 더 순수하고 철저한 중화라는 뜻이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중화’ 즉 세계 중심을 모방하고 출품작을 내밀고, 나중에는 실력자가 되는 일을 역사적으로 훈련해왔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부터 세계에서 인정받는 선진국을 목표로 했다. 한국인은 남들보다 못난 상태를 견딜 수 없어 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차지하는 것, 그것은 생존전략이자 사회정의다.”

결국 한국인은 지정학적인 위치로, 혼돈과 질서 사이에 늘 긴장하며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비록 윤석열의 쿠데타로 인해 잠시 역사가 퇴보하지만, 이것은 새롭게 부활할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시절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불의한 권력과 잘못된 제도에 관해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대로 돌들이 소리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을 죽이는 것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배려와 공감, 사랑과 정의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 말씀은 그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노아 아들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5. 함이 두 형제에게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알리더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 9:18-23)

▲ 노아와 세 아들(pinterest.com)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끝나고, 새로운 재창조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암수 일곱 쌍씩(불결한 동물은 암수 한 쌍씩, 창 7:2-3 참조)의 짐승들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농사를 지어 포도즙을 잔뜩 짜서 단지에 담아 놓았습니다. 술이죠? 그 술을 마시고 술에 취했습니다. 인류역사상 제일 먼저 술취한 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였던 노아는 술에 취해도 주사가 없고, 그저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고 누웠습니다. 그때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 장막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두 형제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4-27)

노아가 술이 깬 후, 세 아들이 행한 것을 보고 말합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고 오히려 다른 두 형제에게 알림으로 노아를 격노케 하여 아들 가나안과 함께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은 복을 받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사후적으로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죠? 노아에 의한 가나안의 저주는 나중에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의 역사적 갈등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배려와 공감의 차원에서 보면, 어떤가요? 노아 시대 인류가 멸망한 주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그 당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죄악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창세기 6:5-7). 이러한 타락 속에서 가족 간의 존중과 부모 공경도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심판을 받았는데, 새로운 창조 공동체 내에서 다시 옛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 멸망의 근본 원인은 전체적인 도덕적 부패와 폭력, 죄악이었지만, 부모에 대한 존중과 같은 기본적인 도덕규범의 붕괴도 그 타락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은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기에 비록 고난이 닥칠지라도 배려하고 공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고 스데반 집사가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셈과 야벳도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배려로 그리고 공감과 정의로 고난을 극복하고 영광된 부활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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