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주석 선생과 지역조직가 참가자들

1993년, 나는 한국YWCA연합회의 청소년 담당 간사로 활동하며 진로와 운동의 방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며 시민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던 그 시기에 황주석 총무님을 만났다.

당시 부천YMCA에서 생협운동을 이끌던 황 총무님은 지역 풀뿌리 조직운동의 선구자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YWCA 전국청년협의회의 강사로 모시기 위해 전화를 드렸던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YWCA에 이렇게 젊은 간사가 있었나”라며 환하게 웃으셨고, 나는 그 따뜻함에 끌려 부천까지 찾아가 뵙게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나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는 기자나 특파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지금은 활동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황 총무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뉴스를 알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한마디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시민운동가로 산다는 것이 어렵고 고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씀은 내가 그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황 총무님과의 첫 강연 자리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며 청년운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선봉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은 달랐다. 그는 이슈 해결만이 운동의 목적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네 안에 국가가 있다.” 그의 말은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말씀은 생활운동과 자치운동의 본질을 깨닫게 해 주었다.

강연 후, 나는 황 총무님께 질문을 드렸다. “청년운동이 생활운동으로 간다면, 청년운동이 담당했던 예각적 기능은 어디서 실현해야 합니까?” 질문에 대해 간단히 답을 하시고는, 더 길게 토론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더니, 강의를 마친 후 돌계단에 앉아서 무려 3시간 동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사회운동의 변화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제가 던져진 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는 주민의 이해관계를 넘어 꿈과 희망을 중심으로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고 하셨고,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하고 공공성을 가진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이러한 가르침은 나의 운동 철학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후 담배자판기 추방 운동, 주민자치 연구모임, 그리고 지방자치제 첫 선거 준비까지, 그와 함께했던 모든 경험은 내가 활동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황 총무님의 논문에서 소개된 ‘사랑의 YMCA노동형제단’ 사례는 내가 대중조직의 힘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민이 주체가 되는 조직은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 모델을 따라 YWCA의 민들레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황 총무님은 단순히 나를 지도해준 선배가 아니라, 나의 삶과 운동의 방향을 이끌어 준 멘토였다. 내가 젊은 나이에 한국YWCA연합회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그는 내가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당시에는 잔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 말씀들은 시간이 지나며 나의 책임자로서의 태도와 자세를 만들어 주는 귀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 황주석 선생의 책인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의 출판기념회 당시 쓰였던 노래 악보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

2003년, 황 총무님은 암투병 중이셨다. 하지만 그는 YWCA 지역조직가 교육에서 열 번의 강의를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완수하셨다. 그는 단순히 강의를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조직운동의 비전과 방법론을 제시하셨다. 그는 조직을 “스스로 정화하며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호수”로 비유했다. 이런 공동체는 단순히 권리투쟁을 넘어, 지속 가능하고 생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실 때 후배들은 황 총무님의 글을 모아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를 발간했다. 출판기념회를 준비하며 나는 그의 책을 한 장 한 장 읽었다. 그가 꿈꾸던 공동체와 마을의 모습은 단순히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날 나는 그를 위한 두 곡의 노래를 준비했다.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와 〈좋은 마을〉은 그의 가르침을 담은 작은 선물이었다. 그가 조용히 미소 짓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의 미소는 “너희가 내 꿈을 이어가고 있구나”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황 총무님은 투병 중에도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셨다. 가족과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홀로 제주에서 투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출장 중에 그를 찾아뵈었다. 그는 풍욕을 하며 나를 맞아주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프고 지치고 외로울 때 미소를 배우지 않으면 언제 배우겠느냐.”

그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걸어온 삶과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었다. 그렇게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서 개척하며 외로움을 견뎌냈다. 그의 강인한 모습은 내가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어갈 때 언제나 큰 지침이 되었다.

오늘날, 청년들이 광장에서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황 총무님의 등대운동이 떠오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촛불을 밝혀 세상을 비춘다”는 그의 철학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의 기반이었다. 그 촛불은 응원봉으로 바뀌어 청년들의 손에서 빛나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열정과 환호 속에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에너지가 담겨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설렘과 기대를 느낀다. 황 총무님이 심어주신 꿈의 씨앗이 지금도 자라나고 있음을 실감하며, 그의 가르침이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나는 장기요양요원을 지원하며, 요양보호사들이 자치와 자결을 통해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황 총무님이 늘 강조하셨던 “문제를 예방하고 부드럽게 해결하는 공동체의 힘”이 여전히 나의 길을 이끄는 큰 방향이다. 단순히 처우 개선에 그치지 않고, 돌봄 노동자들이 자치와 연대를 통해 새로운 변화의 주체가 되길 바란다. 황 총무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지, 그가 지금 계셨다면 어떤 조언을 해 주셨을지 자주 떠올리곤 한다.

“진정한 사회 변혁의 힘은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꿈과 희망을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할 때 운동도 자란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도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씨앗은 여전히 우리의 마을과 사람들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도 걸어가며, 그의 정신을 잊지 않으려 한다.

유성희. 현 서울시 어르신돌봄종사자 종합지원센터장, 전 한국YWCA연합회 사무총장, 전 국립평창수련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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