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velyn De Morgan, 「The Worship of Mammon」 (1909) ⓒWikipedia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바빌로니아가 세운 총독 그다랴를 살해하고 미스바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암몬으로 가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한 장교들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이들은 자신들이 구출한 포로들과 함께 이집트로 도피하려고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들이 아마도 예레미야를 만난 곳은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함일 듯 싶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구덩이에서 풀려난 예레미야입니다. 적을 피해 도망가는 자들과 적에 의해 구출된 자의 만남은 매우 기이해 보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위와 같이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이집트로 도주하는 이들이 이스라엘의 대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간청하는 것은 매우 큰 변화입니다.

그 이전에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성전이 이스라엘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실로의 성전을 버리신 예로 들며 누누히 선포했지만, 이스라엘은 성전을 하나님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한 외세에 의한 멸망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심판이 가까움을 선포하고 그의 경고가 실현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예언자에게 지금의 상황은 씁쓸하기만 했을 것 같습니다. 일찍이 이전에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들에게 아무 기색도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유불리를 떠나 순종하겠다 약속하고 야훼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한가지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말하며 그 이전까지는 야훼를 당신의 하나님으로 부르다가 끝에 와서야 우리 하나님 야훼로 바꿔 부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태도 변화에 마음이 좀이나마 누그러졌을까요? 불쌍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혹 속으로 너무 늦었다 하지는 않았을까요? 어쩌면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법하지만 그는 그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열흘의 시간이 지나갑니다. 이집트로 갈 길을 정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하나님이 지지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순종하겠다고 했지만 만일 그 길을 막으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따지고 또 따졌을 것입니다.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의 답변이 예레미야를 통해 왔지만,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을 하나님의 답변은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머물 것인지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인지, 복과 안전인지, 화와 멸망인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떠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치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망한 땅, 바빌로니아의 보복이 예상되는 땅, 거기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니, 그들은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바빌로니아의 신임(?)을 받는 예레미야의 함정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그들은 잊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것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겐 자신의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복종 또는 순종이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요구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묻고 순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종속시키거나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자신을 기만하였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20절).

저들이 이집트행을 고집하는 것은 바빌로니아의 보복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과 불안은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전에 대한 기대보다 컸고 불순종했을 때 그가 선언하신 화와 멸망에 대한 걱정보다 컸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사고와 행동을 지배할 때 자기 안에서 죽음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자기 뜻에 동조하는 허상의 신을 만들어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두려움과 불안이 없을 수 없겠지만, 내 삶을 그것들에 넘겨주지 않으려면, 자신에 대한 신앙적 성찰이 말씀에 따라 계속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절망 속에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찾아와 우리에게 속삭이며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 속에서 나오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듯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그 두려움과 불안의 정체를 똑똑히 보고 그것들에게 굴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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