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에 실릴 인터뷰를 위한 만남, 가운데 황주석, 왼쪽 김기현, 오른쪽 YWCA 박동순 국장

방황의 시간에 만난 사람

그를 만난 것은 1993년 여름이다. 80년대 시대적 상황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했던 나는 1991년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정신적 붕괴로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좌절과 침잠 속에서 전해들은 ‘부천YMCA 담배자판기추방운동’은 운동 참여자의 주체성, 운동의 규모, 생활의 문제를 사회운동으로 연결시키는 운동방식의 새로움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생각만 하던 것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랄까?

작은 키, 단단한 몸매의 황주석. 그는 처음 만난 후배에게 열정적으로 자신의 운동론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오랜 세월 나의 내면 깊이 간직하고 있던 (하지만 내가 방향을 잃었던) 것을 그가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할수록 쿵짝이 잘 맞고,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의 경계가 없어졌다. 이후 함께 활동하면서 기독교적 배경, 역사변화의 주체를 시민으로 바라보는 관점, 남미의 소공동체운동과 알린스키로 대표되는 CO(Community Organization)의 사회운동론을 그나 나나 운동의 바탕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소개로 1993년부터 안양YMCA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수도권 주민자치 연구모임’ 간사 역할을 맡겼다. 수도권주민자치연구모임은 전문가와 운동가가 함께 모여 연구하고, 토론해야 운동이 발전한다는 그의 소신에 따라 연세대 이신행 교수가 회장을, 그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작은 공부모임이지만 ‘주민자치’에 관심있는 전문가와 운동가들이 두루 참여해 한 달에 한번 국내외의 주민자치운동 사례를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했다. 이 3~4년의 시간이 나에게는 운동론의 얼개를 새로 세우는 중요한 시기였고, 그의 운동론을 입체적으로 알아가는 계기였다.

황주석의 소그룹운동론

한국 사회운동 역사에서 그의 가장 큰 기여는 하나의 운동론을 뚜렷하게 남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치열하게 연구하고, 세밀하게 다듬는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사회운동과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잘 알고 있었고, 남미의 가치변혁적 소그룹운동, 한국대학생선교회(C.C.C)와 가톨릭청년회(J.O.C)의 소집단운동을 연구하며 사회변화의 주체로서의 시민, 시민의 주체적인 힘을 길러내는 소그룹운동이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1980년 초 마산YMCA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사랑의 Y형제단운동’으로, 1980년 후반 부천YMCA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등대운동’으로 구체화시켰다.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사랑의 Y형제단 운동’의 주체들이 마산창원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으며, 1991년 지방자치를 계기로 ‘등대운동’의 주체들이 ‘담배자판기추방운동’‘수은건전지 수거운동’‘의정지기단’ 등 참신하고, 당당하게 생활운동의 시대를 열어나가면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일제침탈과 군사독재를 넘어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또 다시 물질만능, 경쟁제일, 환경파괴로 치닫는 한국사회를 곧잘 ‘시지프의 신화’에 비유하곤 했다. 시지프처럼 시민들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 기득권층의 힘에 의해 다시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시민들이 바위를 올리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야 하는데 그 쐐기가 바로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직된 시민들이 집단이기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공익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소그룹 활동을 통한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 담배자판기추방 전국연대 결성대회

시민들의 꿈과 희망을 담는 소그룹

그는 조직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직의 목적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1984년부터 부천YMCA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시대의 변화가 생활의 시대로 바뀌었고, 생활의 시대는 여성이 주역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소그룹운동인 ‘등대운동’을 조직한다. ‘등대운동’은 5-7명으로 하나의 등대를 만든다. 5-7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것은 한명 한명이 소외되지 않고, 인격적으로 드러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일상을 바꾸기 위해 한주에 1회 모임을 원칙으로 한다. 등대가 모이면 초를 밝힌다. 1부 의식으로 명상, 시낭송, 노래부르기, 생활나눔을 하고, 2부 활동으로 독서, 환경, 사귐, 건강을 주제로 한주에 한 가지 활동을 한다. 등대 모임은 1시간 30분-2시간 정도 한다.

소그룹운동에서는 ‘상징’과 ‘문화’가 중요하다. 마산에서 펼쳤던 ‘사랑의 Y형제단’에서는 ‘빛과 소금 의식’이 있었고, ‘등대운동’에서는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모임의 상징이었다. 등대운동 참가자 개인은 촛불로 불렀고, 00엄마가 아니라 “000촛불님” 이렇게 본인의 이름으로 부르며 자기정체성을 찾아갔다. 좋은 노래를 부르고, 한주의 생활을 돌아보는 ‘생활나눔’을 통해 성찰과 각성의 순간을 함께 한다. 등대가 모인 마을모임이 있고, 마을지기가 촛불들을 살피고, 마을의 공통된 일을 등대지기, 촛불들과 함께 한다.

부천YMCA는 등대운동이 중심이 되어 1990년 생활협동운동을 창립하여 먹거리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1991년 ‘지방자치 시대’ 개막과 함께 시작된 ‘의정지기단’ 활동, 1992년 ‘담배자판기추방운동’을 통해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조례를 통해 담배자판기를 철거하게 된다.

사람을 낚는 어부, 황주석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강사로 기억할 것이다. 신학을 공부한 그는 수많은 비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가능한 쉽게 전달하곤 했다.

황주석: 여러분 조직가는 연애하는 것같이 해야 해요. 젊은 남자가 길 가다 맘에 드는 여자 만나면 슬쩍 손수건 떨어뜨리죠?
청  중: (요즘은 그렇게 안하는데)
황주석: 여자가 손수건 들고 “여보세요” 하면 깜짝 놀란 척 다가가 슬쩍 말 걸죠? 조직가는 연애하듯 그렇게 계기를 만들고, 상대방에게 정성을 들여야 해요.

김기현: ‘사랑의 Y 형제단’ 의식 중에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하면서 촛불을 켜고, 소금을 먹는 것이 있었지요? 어떻게 보면 유치하게 느껴지는데 거친 노동자들이 어떻게 잘 참여하게 됐는지요?
황주석: 노동자들이 거칠다는 것은 지식인들의 편견입니다. … 노동자들은 말은 거칠지만, 속은 여리디 여린 사회적 약자이고, 평범한 젊은이들일 뿐입니다. ‘사랑의 Y 형제단’을 만들면서 주변 사람들과 여러 의견을 나누었는데 의식을 진행하고, 눈감고, 명상하는 것은 여자들이 하는 행위지 청년 노동자들에게 맞겠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남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에서 성호를 긋는데 이것은 일체성을 형성해주는 귀중한 심벌(Symbol)이다. 심벌은 유치하게 보면 다 유치하다. 신부들이 성수라면서 물을 뿌리는 것도 유치하고, 예수의 살과 피라고 먹는 성만찬 또한 얼마나 단순하고 유치한가. 모든 심벌은 단순하고 유치하지만, 심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엄청난 힘의 근원이 된다. 태극기, 애국가, 교가, 이것이 다 심벌이다. 그것을 내화하면 그 말만 들어도 눈물이 철철 흐르게 된다. 심벌을 내화하도록 하는 것이 조직화의 엄청난 힘이 된다.”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그가 의정부YMCA 사무총장으로 잠시 있을 때 자활후견기관을 운영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자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김기현: 사무총장님, 자활기관에 오시는 분들 다 어렵고, 상처 많은 분들인데 어떻게 공동체로 조직하려고 해요?
황주석: 면접 봐서 사람 뽑거든, 면접 볼 때 사람들이 쭉~ 기다리고 있잖아 그때 (미리 짜서) 두 사람을 싸움시키는 거야. 그럼 남 싸우는 거 신나게 구경하는 사람, (심심한데 잘됐다며) 싸움판에 뛰어들어서 더 판을 키우는 사람이 있지? 반면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자기가 나서서 싸움 말리는 사람이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쫙~ 뽑으면 공동체가 얼마나 잘되는데.
김기현: (졌다.)

평소 그와 형제같이 지냈던 대화문화아카데미 강대인 원장께서는 농담처럼 그를 ‘모임중독자’라고 불렀는데 진정한 사회변화는 소그룹활동으로 훈련된 시민, 주체적이고 각성된 시민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그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암에 걸린 후 그는 주변의 암환자 4-5명과 함께 ‘환우회’를 조직했다. 함께 모여서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자는 뜻이다. 비록 그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지만 그 시간은 모두에게 힘이 되었다.

▲ 등대모임

성취하는 운동

그는 문제제기와 비판 중심, 전문가 중심의 운동에 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제기 보다는 시민들과 함께 학습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작은 문제라도 해결해나가는 시민운동, 문제제기 보다는 성취하는 운동이 되어야 시민운동이 한국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부에 비유하면 일반 시민들은 덧셈, 뺄셈의 초등수학을 풀고 있어요. 그런데 전문가와 운동가는 자꾸만 함수, 방정식 등 고등수학을 내줍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어렵다고 하면 무식하다고 몰아붙이고 자기들끼리 고등수학을 풀고 있어요. 그러니까 운동이 자족적으로 되고, 잘난척하는 운동으로 변질돼요. YMCA 간사는 시민들이 초등수학을 잘 풀도록 돕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기다리고,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전문가들 따라서 혼자서 저만치 나아가면 YMCA 간사는 아니지요.”

1991년 지방의회가 처음 구성되었을 때 부천YMCA 촛불들이 중심이 되어 ‘의정지기단’을 구성하여 처음 개원하는 시의원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하였고, 이 장면은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름을 정할 때 그와 유명한 시민운동가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문제제기하는 분은 “‘의정감시단’이 아니라 ‘의정지기단’이라고 하는 것은 시민운동을 희화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그는 의정감시 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의정을 돕고, 함께 하는 역할이 중요하다며 ‘의정지기단’을 고수하였다.

그는 역사의 주체는 평범한 시민들이라고 굳게 믿었고, 시민단체 실무자는 요리사처럼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눈에 띄는 파티의 주역들은 시민들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를 만나고, YMCA에서 일하면서, 운동론에 대해 뜨겁게 토론했고, 많은 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여성회원들과 ‘등대운동’을 함께 하면서 나 스스로 생활인으로 거듭났고, 시민운동은 거대담론이 아니라 생활과 일상에서 실천하고, 깨닫는 것이라는 배움이 있었다. ‘등대운동’을 통해 전국 여러 지역YMCA에서 여성지도자들이 배출되고, YMCA운동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가 암으로 일상활동이 어려워지자 그와 함께 생활운동, 소그룹운동을 공부했던 YMCA, YWCA, 한살림 실무자들이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2005년 10월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모심과 살림연구소)를 발행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부족하나마 그의 운동론 얼개를 책을 통해 알 수 있고, 그의 뜨거운 열정이 문자 너머로 전해진다. 기후위기, 물질만능, 극단적 대립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 그가 있었다면 어떤 입장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오늘은 그가 더 그립다.

김기현(부천YMCA 사무총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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