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뜰 페이스북

늙은 세대 김상봉 교수 비판의 핵심

‘리(理)를 수호하라’, 이 말은 지난 6월 “동아시아 지평에서 본 서학 배척론”이라는 주제 아래 열린 한 학술회의 발표 논문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김상봉 교수의 《영성 없는 진보》라는 책을 읽고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였다. 김 교수는 우리가 알다시피 한국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일찍부터 “거리의 철학자”라는 말을 들었다. 지난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민주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거의 모든 핵심 주제들을 철학적으로 다루면서 진정 ‘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잘 실천해오신 분이라 여겨진다.

올 2월에 초판이 나왔고, 이후 많은 반향을 일으키며 쇄를 거듭하고 있는 《영성 없는 진보》는 김상봉 교수가 그동안 철학자로서 한국 사회 민주주의 발전의 과정과 현실에 깊이 관여하면서 얻은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오늘 한국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면서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을 시도한 책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오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은 그동안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워온 사람들이 참 목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거기서의 참 목표 부재란 모든 사람이, 선인이든 악인이든, 또는 우리 편이나 대항해서 싸우고자 하는 반대편이나 모두가 ‘한 몸’이고, ‘전체가 하나’인 것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밝힌다. 그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그러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싸우기보다는 자기 정당과 자기편, 자신의 당파적 이익에 휘둘리며 나라가 심각한 갈등과 분파에 빠졌다고 읽는다.

특히 광주 5·18 이후 1980년대 민주화를 위한 싸움은 일종의 죽기 살기 식의 진영 싸움과 권력 투쟁이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는 “영성”이라는 말을 가져와서 그렇게 우리 전체가 한 몸이고 하나라는 감각과 의식을 갖는 것이 ‘영성’인바, 그와 같은 영성은 한국사에서, 그리고 한국 현대 민주화 운동의 전태일 시기나 서준식 시기까지는 실재했으나 그 이후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평가한다.

젊은 세대 남기업 소장의 반격

여기에 대해서 그러나 젊은 세대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의 비판과 논변은 날카롭고 무겁다. 남 소장은 김 교수와는 달리 한국 사회 내지는 정치 전체의 위기를 말하기보다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문제에 주목하며, 오늘 우리 사회 불의와 민생 문제의 핵심을 ‘부동산’ 문제로 보면서 ‘토지정책’이라는 한 구체적인 안건을 잡아 거기서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몰두하는 기독교 사회운동가이다. 그런 남 소장이 보기에 김 교수의 분석은 일종의 “단순한 일반화”이고, 거기에는 짙은 “허무주의”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특히 김 교수가 ‘영성(믿음)’과 ‘진보 민주화 운동’을 연결하는 것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도대체 한국 민주주의 위기를 논하는데 ‘정치’와 ‘종교’, 또는 정치와 영성 내지는 믿음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고 일갈한다.

지금까지 김 교수가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 몰두해온 영역을 보면 재벌기업 개혁과 노동자 경영권 문제, 한국 사회 학벌 문제, 진보정당 운동 등, 일반적인 의미로 매우 직접적인 정치 문제와 교육 문제 등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믿음’이나 ‘영성’ 등의 거대한 종교나 신학의 물음을 가져와서 그것으로 한마디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하고, 1980년대 광주 5·18 이후에 다양하게 전개된 한국 사회 진보 운동을 일종의 실패 또는 “퇴행”이라고 보는지, 남 소장은 그런 분석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차례차례 그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반박한다.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남기업 소장이 밝히는 김상봉 교수의 ‘일반화’의 오류

먼저 남 소장은 김 교수가 5·18 이후 진보 운동이 “사랑 없는 증오와 적대감”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서 그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음을 강하게 논변한다. 그에 따르면, 5·18과 같은 극악한 학살과 권력 찬탈을 겪고 난 세대의 격렬한 반응은 겉으로 보아서는 김 교수처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김교수가 보기에 과격한 반응은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더욱더 깊이 있게 응답한 것이고, “깊고 강한 사랑”이 기초가 되어서 표현된 것이지 결코 사랑과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때 진보 운동가들의 감정은 “처절한 사랑과 부끄러움”이었고, 5·18 이후의 진보 운동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현상 이면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노출한 갈등과 분열이었지 결코 스스로가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다는 강변이다. 예를 들어 거기서 격렬하게 표현된 미문화원 방화나 점거 농성, 그러면서 대학 졸업도 포기하고 공장으로 위장 취업해 들어간 것 등, 그러한 모든 탐색과 추구를 “‘사랑’에 기반을 둔 비상한 용기의 발로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하며, 김상봉 교수의 부정적인 분석은 그래서 일종의 “모욕”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진다고 항변한다.

남 소장도 한편 1980년대 이후 진보 운동이 일부 적대적 분열로 치닫는 정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 역사에서 “가라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진보 운동 전체를 한가지로 비판하며, 그것을 ‘영성’과 ‘믿음’의 부재라거나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권력 투쟁에 매몰된 속류 혁명가”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너무도 과한 일반화이며, 섬세하지 못한 지나친 오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남 소장은 그렇다면 왜 김 교수와 같은 분이 그러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정치와는 무관해 보이는 ‘영성화’의 물음으로 한국 진보 운동을 해석하려 하는지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추측에 따르면, 그것은 김 교수 자신의 ‘진보신당’ 실험 실패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나 본인은 거기에 더해서 김 교수의 어린 시절 가정적 배경이 된 기독교 신앙에서의 “절대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에 대한 회고와 연결되지 않나 생각한다.

남 소장은 김 교수가 개인적으로 격렬하게 겪은 진보신당 실험과 관련해서 거기서 적대적 분열의 원인을 묻는 오랜 질문 속에서 그 내부적 증오와 분노, 적대감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영성과 믿음의 상실과 부재’에서 찾았다고 추측한다. 그렇게 김 교수는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불화 속에서 “더는 종교와 관련 없는 세속적 정치 운동”으로 화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 교수가 오늘 광화문에서 나타나는 ‘촛불 집회’와 ‘태극기 시위’의 현실을 멀리 1940년대 해방 공간에서의 ‘남로당 무장대’와 ‘서북청년단’의 충돌이 있던 때로 “퇴행”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유라고 분석한다. 한 인간에게 있었던 궁극적인 초월 경험과 거기서의 하나 됨의 감각이 얼마나 한 사람의 의식에서 근원적인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여기서도 잘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상봉 교수의 인문주의적 ‘허무주의’에 대하여

남기업 소장은 이어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판적 질문을 김상봉 교수에게 제기한다. ‘촛불’이 지고지순의 선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오늘 윤석열 정권의 패악과 소위 ‘보수·반공’ 세력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냐는 물음이다. 특히 촛불은 결코 김 교수가 비판하는 대로 사랑 없는 증오에 기반을 뒀다거나 권력 투쟁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등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응답과 민주공화국을 부정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세상을 향한 열정과 의지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런 점을 김 교수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 소장에 따르면, 그와 같은 김 교수의 오독은 그가 저항과 투쟁의 현장에서 멀어져 “자신만의 관념의 성채에 갇혀” 있으므로 야기된 것이고, 그것은 곧 심각한 “엘리트주의”와 “허무주의”, “현실과의 투쟁과 실천이 없는 메시아 대망론”에 빠져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뼈아픈 지적이고, 지금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실천 지성으로서 역할을 해온 김상봉 교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비판일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일찍이 서구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연결 고리를 찾아가면서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이후 낭만주의적 인문주의들에게 가했던 비판이 생각났다. 그것은 그들이 빠져들었던 ‘인류의 하나 됨’이라는 관념주의적 오류에 관한 것인데, 아렌트에 따르면 당시의 낭만주의적 인본주의자들은 한껏 인류의 하나 됨과 한 몸에 대해서 말하다가도 그들이 유일하게 진정한 현실로서 경험하는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거나 정치 상황이 바뀌면, 그 갈등과 위태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스스로가 인종주의자가 되고, 자기의 사적 지위의 보존을 위해서 변절하거나 또 다른 관념을 끌어와서 자기주장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아렌트는 그들 낭만주의적 인문주의가 가지는 사실과 삶에 근거하지 않는 허약한 관념성과 자신의 사유가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지적 자만, 그래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답이 없이 어떤 개인숭배에 빠지거나 여기 지금의 실제적 갈등과 문제를 보지 않고 미래에로만 시선을 돌리도록 하는 것 등으로 지적한다. 그런 지적 허약성과 자기 폐쇄성 안에는 깊은 외로움과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고, 나치나 무솔리니, 스탈린의 인종주의적, 제국주의적 전체주의에 그러한 낭만주의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한길사, 2006), 334쪽 이하]

김상봉 교수가 말하는 ‘참믿음’

남 소장은 계속해서 김 교수에게서 발견한 허무주의의 실체를 추적해 간다. 지난 9-10월호 《씨알의 소리》에서 박득훈 목사가 이 두 분 사이에서 또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김 교수가 믿음을 강조하고, 모두가 하나라는 의식의 영성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런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된다는 것인지, 단지 그런 믿음의 사람을 ‘기다리자’라는 말 외에 다른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대해서 남 소장도 그런 답답한 마음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남 소장은 그 답 없음과 행위 없음의 답답함을 보고서 “어떤 실천 의지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남 소장이 보기에 김 교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믿음, 그러한 영성을 가진 진보 운동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고, 그래서 그 운동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도래도 불가능해 보이므로 거기서 “허무주의”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라고 지적한다. 나에게 이 비판은 적실해 보이고, 원론적으로 김 교수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박득훈 목사는 그러나 그것을 “허무주의”나 “현실 도피적 메시아니즘”으로 보는 것은 과한 비판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나로서는 젊은 세대의 이 비판에 대해서 한국 사회 기성 진보그룹이 더욱 진지하게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김상봉 교수도 논의를 펴나가는 데 있어서 하나 됨이란 항상 ‘차이’ 속에서 일어나고, “차이와 대립 없는 하나 됨이란 언제나 죽음의 징표이다”라는 말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결론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믿음을 기다림”의 그 믿음이란 “싸구려 장신구”와도 같이 “한 개인의 구원이나 영생에 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고, “전체에 대한 믿음”이면서 “그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후 그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정도로 핵심 관건이 된 “참된 믿음”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보다는 “본래 그리스도교만이 역사적 종교다”라는 말 등을 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나누어짐을 비판하고, 그래서 그러한 분열로 인해서 “종교개혁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더는 역사적 종교가 아니다”라는 등의 문제적 발언들을 이어나간다. 나에게 이러한 응답들은 김상봉 교수가 종교나 영성을 말할 때 매우 서구 기독교 중심적이면서도 동시에 헤겔과 같이 역사상의 모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종교를 부정하면서, 앞의 아렌트 비판처럼 철저히 서구 관념론적 자아 절대주의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김상봉 교수가 마지막으로 밝히는 참믿음이란 “그 불가능한 믿음을 믿는 것”이고, 서구 기독교 정신사에서 그는 결론적으로 니체나 키르케고르, 본회퍼 등을 불러오면서 마무리로 “믿음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이성’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역사의 뜻과 의미가 있다’라는 것을 믿는, 그 불가능함을 믿는 참믿음의 예로서는 한국역사에서 최제우와 한용운, 전태일의 예를 가져오는데, 내게는 많이 모순되는 결론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오늘날 광화문 전광훈류의 보수 개신교 신앙을 ‘사기범’이나 ‘성폭행범’으로 전락한 경우라고 비판하지만, 스스로가 주창하는 믿음은 자칫 어떤 보수 기독교의 그것보다도 더 강하게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믿음’ 절대주의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남 소장의 비판대로, 김 교수가 오늘의 진보 운동 자체를 증오와 적대에 기반을 둔 권력 투쟁만 남았다고 비판하거나, 4·3에서의 남로당 무장대의 정당한 항거를 상대에 대한 증오와 적대에 기댄 “배반당한 항쟁”이었다고 평가하는 일 등이 가능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서구 기독교 문명에서 배태한 ‘하나’, ‘전체’, ‘믿음’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강력한 원리적 이데올로기〔理〕가 되어서 지금 여기 현재와 과정과 개별과 구체의 현실〔氣〕은 한갓 지나가는 종속의 것으로 여기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믿음’에 대한 통합학문으로서의 한국 ‘신학(信學)’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남기업 소장도 마지막으로 밝혔듯이, 김상봉 교수의 《영성 없는 진보》는 우리에게 다시 삶과 역사, 모든 사회적 실천과 존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 의미와 목표의 차원, 종교와 믿음의 차원이 있음을 지시해 준 것이다. 그가 어떤 염려와 우환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그가 말한 대로, 그동안 진보의 타자 비판이 “타자의 부정” 수준에 머물러서 오늘 한국 사회 소위 보수와 진보 사이의 반목과 배타, 혐오와 비난이 극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대안으로 내놓은 ‘믿음’과 ‘영성’의 길이 다시 우리 의식과 행위를 한없는 수동으로 몰고, 또 다른 의미의 절대 앞에서 손 놓는 일로만 읽히도록 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혹시 남 소장과 같은 젊은 세대가 세상이 온통 이성과 과학과 행위의 일이라고 하거나, 모든 지향과 노력이 오직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 한국 사회 진보 운동도 한편으로 경청해야 하는 ‘믿음’과 ‘영성’의 물음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큰 딜레마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김 교수가 서경식의 예를 들어서 ‘유물론’이어도 “유신론적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전향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유신론’, 또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는 철저하지 못하고 일관되지 못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즉 김 교수의 ‘믿음’ 이해는 여전히 서구 기독교 신학의 인습적인 ‘신앙 유비’ 차원에 머무르면서 또 하나의 엄격한 기독교 ‘신앙 근본주의’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가 오늘 우리 의식의 정황이 탈종교와 탈신화화의 근대를 넘어서 새롭게 ‘재신화화’를 요청하는 ‘근대 이후(postmodern era)’에 이르렀고, 그래서 다시 ‘믿음〔信〕’과 ‘영성’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것은 지적해 주었지만, 그 ‘믿음’이 예전과는 다르게 다양한 새로운 차원을 포괄하고, 그러므로 그 차원에 관한 더욱 진지한 탐구가 요청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을 말한다. 그의 《영성 없는 진보》는 그가 주장하는 ‘믿음’에 대해서 깊이 있는 성찰과 탐구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믿음’에 관한 학, 그것을 하나의 학으로 세우는 ‘신학(信學)’이 요청된다고 말하고자 하고, 그것을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회‘로 언술하면서 그 믿음의 일을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새롭게 밝히는 일에 힘쓰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고유의 동아시아 종교와의 만남이나 현대 페미니즘과의 조우, 오늘의 여러 과학적 언어와 더불어 새롭게 말하기 등의 일이 될 수 있겠다.

‘리기(理氣)’ 논쟁으로서의 김상봉 교수와 남기업 소장의 논변, 그리고 그 통섭

한국 신학(信學)이 믿는 ‘믿음’은 김상봉 교수가 여전히 매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초월적 신에 대한 서구 기독교적 유신론적 믿음의 차원이 다가 아니고, 바로 그 초월적 신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안과 세상의 만물에 ‘뜻〔理〕’으로 내재해 있고, 그것을 믿는 것이 참믿음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김 교수가 매우 비판한, 여기 지금에서의 갈등과 분열과 적대 속에서 진보와 정의를 위해서 고독하게 싸우는 저항〔敬〕도 바로 우리의 깊은 신앙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러한 저항과 투쟁의 일이 영성과 믿음과 관계없다고 말하는 일은 너무 좁은 시각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한다.

또한, ‘믿음’이라는 것도 어떤 한순간, 어떤 실체적 대상에 의해서 찰나적으로 가능해지는 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장기간의 과정에서, 세상 속의 온갖 일 가운데서 지속적인 인내와 성실, 진실과 함께 영그는 ‘지속성’〔誠〕의 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오늘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믿음과 초월 이해가 더욱 요청되고 크게 역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진보 운동과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도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 개인의 인격적 성장과 함께 가는 일로 이해하도록 하고, 거기서 종교와 정치·경제, 종교와 문화, 종교와 교육 등의 일이 서로 별개로 나뉘기보다는 믿음의 시선 안에서 함께 이루어 나가도록 하는 일종의 ‘통합학문’(Integral studies for faith)의 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김상봉 교수와 남기업 소장의 논변이 나에게는 일면 우리의 오래된 개념으로써 과거 조선 사회에서의 ‘리기(理氣)’ 논쟁처럼 들리기도 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 사이의 갈등 이야기를 말하는데, 그러나 거기서의 우리 오래된 미래의 지혜는 결코 두 차원이 어느 한쪽에 의해서 하나로 폭압적으로 일원화되거나, 아니면 서로 상관없는 절대의 둘로 나누어져서도 안 되고, 두 차원이 ‘서로 나누어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不相離 不相雜〕’ ‘불이(不二)’의 관계를 유지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할 때 거기서 진정 생명과 삶이 꽃피고, 열매가 맺어지며, 삶이 지속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곧 여기서 김 교수와 남 소장의 관점이 두 개의 별개 관점으로 서로 갈등할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으로 서로 자극하면서 보완하는 관계로 상생하는 일을 가리킨다. 나는 이러한 두 차원의 관계 맺음의 일을 “거룩의 평범화”와 “성(聖)의 일상화”의 일이라고도 했고,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세밀하고 정치한 논의가 더욱 요청되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주제의 일에 관해서는 다 발설할 수 없고, 한편으로 김상봉 교수의 경우도 이번 책에서는 그러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새로운 진보 운동과 ‘신뢰의 그루터기’ 세우기

예전 우리 오래된 미래의 한 가르침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퇴계 선생 말씀 가운데 ‘택의미정(擇義未精) 호오다류(好惡多謬)’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당시의 선비들이 ‘무엇이 의(義)인가를 가리는 데 있어서 정밀하지 못하고, 무엇이 좋고 싫은지의 감정과 취미에 오류가 많은’ 것을 질책하시는 말이었다. 즉 나라의 일을 하고 공적 책임을 진 사람의 인격은 그의 판단과 감정이 곧 한 사회의 정의 판단과 선악에 대한 인간 감정에 있어서 ‘기준’이 될 만큼 성숙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것을 오늘 우리 논의에 적용해 보면, 이제 진보 운동과 민주화 운동도 결코 이러한 개인적인 인격 형성과 영성 차원의 일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되고, 특히 오늘과 같은 ‘탈진실(post-truth)’과 포스트 휴먼의 시대에는 이러한 공(公)과 사(私)의 통섭이 더욱 긴요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의 말과 감정과 판단이 너무도 쉽게 자기 이익과 자기 파당의 손익에 따라서 좌우되고 있다. 그래서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졌고, 상식과 감정과 공감력이 크게 훼손되고 깨어진 것을 말한다. 한국 사회가 과거 진보 운동의 많은 희생과 헌신으로 이만큼 민주화되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바로 그러한 민주화 운동도 토대로 삼아왔던 선악과 의와 불의에 대한 인간 감정과 판단력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면, 오늘의 진보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그 기초를 다시 잘 세우는 일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진보 운동은 과거의 그것보다 더 어렵고 지난한 일이 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 삶 자체로써 우리 사회적 삶을 위한 ‘신뢰의 그루터기’를 세우는 일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민주화를 포괄하는 일이며, 바로 그와 같은 새로운 민주화의 길이 김상봉 교수도 “영성 없는 진보”를 넘어서서 ‘믿음을 믿자’는 일로 주장한 것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 읽기―神學에서 信學으로》(모시는사람들, 2023)]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