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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치산 아지트 내부 모형 ⓒ위키피디아 |
남원 풍경
1. “당신은 정말로 공산주의자였나?”
그러면 나는 지체없이 대답한다. “그렇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의 북한체제를 지지한다는 말이냐?”
“아니. 절대아니다.”(최정범 증언, 강동원 엮음 《지리산 달궁 비트》 [서울: 한울, 2016]에서)
2. 내가 중학교 1학년 등굣길에 정화극장 건너편 통나무 자르는 공장 톱밥더미 옆에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어 가보니 피 묻은 가마니에 덥힌 세 사람의 시체가 뉘어있었고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마지막 빨치산이래” 수년전부터 B29가 뜨면 어김없이 쏟아내는 구름더미 같은 빨치산 귀순 삐라도 이제는 끝이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3. 내가 중학 2학년 여름 지리산 등산을 하고 내려온 다음 날은 1957년 8월 13일이다. 이날 이모님이 아이를 출산하였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해학아 나 좀 도와줘!” 하는 이모님의 급한 부탁에 나는 엉겹결에 아이를 받는 도우미 역할을 하였다. 이모님이 시키는데로 가위를 챙겨드리고, 물을 끓이고, 아이를 거꾸로 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쭈굴쭈굴한 아이를 목욕을 시키고, 미리 사 놓은 옷을 입히고, 이모 가슴에 안겨 드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일은 축복받은 출산이라기보다 우리 역사에서 비극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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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한대순, 민초들의 고난 감내
순창군지의 기록에 보면 아버지가 빨치산을 피해 숨어 다니는 동안에 51년 11월 25일 수도사단과 8사단,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전투경찰연대가 모인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남한 빨치산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백야전투사령부가 전주에 설치되고 영호남에 12월 1일자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백야사령부는 네 번의 작전을 통하여 빨치산 5,009명을 사살하고 3,968명을 생포하고 45명이 귀순시켰으며 341개의 은신처를 파괴하였다. 당시 전북도당의 주력부대인 황학소의 45사단은 지리산으로 이동 중 성수산에서 토벌대에 걸려 절멸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순창 시골의 죄 없는 한 남자를 구원하지는 못하였다.
아직도 가족들은 그 일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말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이모는 딸과 아들을 남겨둔 채 주홍글씨를 뒤집어쓰고 쫒겨나 우리 방에 와서 아이를 낳았다. 생존을 위해서 별짓을 다 하였다. 후에 어느 선한 경찰이 운영하는 양로원에 부름받아 밥해주며 거기에서 아이를 기르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이모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어요? 스무 살에 남편 죽고, 아들과 딸 빼앗기고, 빈손으로 개처럼 쫓겨나고, 그리고 아무도 원치 않는 아기를 낳게 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주면서 어떻게 믿음으로 사람답게 살아요?” |
전쟁은 한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부수면서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비극의질곡에서 민초들의 침묵이 어둠의 무개를 만든다.
달궁트 빨치산 대장 최정범을 통해 본 개인운명
<달궁 비트>는 남원군당이 은거한 아지트였다. ‘비트’는 비밀 아지트를 줄인 말이다. 당시 빨치산유격대원들은 지명 뒤에 ‘트’ 자를 붙여 ‘뱀사골트’, ‘달궁트’라고 불렀단다.
최정범 빨치산 대장은 1942년 14세 때 아버지 대신 강제징용에 끌려가 함경도 장진호 수력발전소 도수터널 공사 현장 노무자로 일하였다. 1944년 16세 때 징용영장에 의거해서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일본 병참기지 치사장 노무자로 일하며 온갖 학대와 불평등을 경험하였다. 그에게 해방 후 고향 남원에 돌아왔자만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다. 이백면에도 경찰지서가 생겼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빌붙어 경찰 노릇을 하던 자들을 대부분 그대로 다시 기용해 각 지서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일제 앞제비 노릇을 하던 악행 순사들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았단다.
바로 그때, 이백면 인민위원장인 안평오가 전해준 ‘만민이 차별없이 평등하고, 그래서 인민이 풍족한 삶을 구가하는 세상’은 구원의 복음 같았다, 그는 공산주의는 그 이상사회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실현을 위해서 자기 생애를 바쳐도 좋다고 결심하였다. 그가 달궁 비트의 빨치산 대장이 된 경위이다.
여순사건과 빨치산
1948년 4월 3일부터 이승만 단독정부 선언에 불만을 가진 제주도가 살육의 불바다가 되었다. 제주도 토벌을 준비하기 위해 1948년 5월에 급조직 창설된 14연대는 10월 19일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남로당과 연결된 세력이 있었기에 동족인 제주도민을 총칼로 사살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군, 미군, 경찰을 대거 파송함으로 살육전이 일어난 사건이다. 이를 수습하러 온 중앙당 노동부장이던 이현상은 직격적 전면전을 감당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대 활동으로 전환한다.
한때는 ‘여순 반란’으로 불렸으나 학계에서는 ‘여수 제14연대 반란’, 또는 ‘여순병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고아들은 이현필 선생이 동광원에 수용하였으나 낙오자들은 지리산을 점거하게 된다. 뱀사골에 세워진 지리산지구전적 기념관 안내에는 ‘전국 빨치산 4만 2천명 중에서 지리산에 2만 5천명의 공비들이 할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조선시대 양반에 쫒기어 들어 온 노비부터 임진란 피난자들을 비롯한 자발적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원주민이 되어 약초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념을 투쟁의 도구로 삼은 사람들이 현대사의 격동기에 빨치산 시대를 연다. 연구자들은 지리산 빨치산을 신구 두 단계로 나눈다. 구빨치산은 여순사건으로 대거 유입된 사람들이다. 6.25 전쟁 후 낙오자들이 들어와 투쟁한 사람들을 신빨치산이라 한다. 이현상 정순덕 이태(李兌)와 같은 사람들을 신빨치산에 포함한다면, 하준수같이 신.구 빨치를 걸처 있는 사람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다수의 양민들이 있는데 그들은 어떤 이념에 동조하기보다 강제로 끌려 들어가 빨치산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를 빨치산이라고 한다. 백야전투 사령부 전과는 사살 5천9백명, 생포 3천968명, 귀순 45명 은거지 파괴 341개소로 보고되어 있다.
여순사건과 조직책임자 박정희
여순 14연대 사건에는 박정희 장군이 조직책으로 역할을 하였으나 발각이 나자 이용문 장군을 통해 미군에게 협조한 사건이다. 조직책들은 전원 수색에서 기관총살을 당하고, 살아남은 박정희는 5.16 쿠테타 후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용문 장군(6.25전쟁 때 사망)의 아들인 이건개 검사를 최연소 서울시당 검찰총장으로 보답하였다.
이건개 공안검사는 70년대 민주화 운동가들을 대거 구속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대통령비서실 사정담당 비서관을 거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중앙수사1부장,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 제32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을 거처 제15대 국회의원까지 하였다.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않았다면 대권도 내다보는 위세였다.
귀순 빨치산의 갈등과 생존의 몸부림
그러나 자기가 목숨을 바쳐 이루려던 이상국가는 현대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세습체제가 되고 무엇보다 인민을 억압과 굶주림과 도탄에 빠뜨린 북한의 현제 모습은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이라고 증언한다.(《지리산 달궁 비트》)
당시에는 산내면에 박정희지지 표수가 할당되어 있었기에 살아남기 위해서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최정범을 비롯한 수많은 빨치산 노병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여당 후보의 선거를 돕거나 삐라를 돌려야 했다.
| “흥미롭게도 당시 내가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다녀야 했던 곳은 주천, 산내, 아영, 운봉, 동면, 이백, 산동, 보절 등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에 보급투쟁을 다녔던 지역들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타도하려고 투쟁했던 남쪽 정가의 보수 정치인에게 표를 달라고 떠들면서 그런 지역들을 누비고 다녔으니 완전한 자기모순이었다.”(《지리산 달궁 비트》, 245쪽) |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녹아 들어가 그토록 타도하려고 했던 그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 동원되어 삐라를 돌리던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지리산 달궁 비트》, 230쪽) |
이미 전쟁은 끝나고 생존을 위해서는 체제 유입이 불가피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꿈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실종 자체이다. “그래도 그때는 죽창이라도 있었다” 동학도들과 같은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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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치산의 주요 아지트 ⓒ위키피디아 |
최정범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자화상이다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조선 반도 천지에 널린 수많은 어린 ‘최정범들’의 일상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경제적 조건이었다면, 친일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며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최정범이 속한 정치 세계의 본질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가지 정략적인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오히려 친일파를 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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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경시서는 경찰서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고 구타했던 경찰관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곤봉과 수갑은 가난한 평민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터였다. 친일을 했던 이들은 다시 기용되어 경찰이 되었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최정범에게, 아니 그 시절 빨치산으로 입산한 수많은 공산주의자에게 그 모습은 견딜 수 없이 역겹고 슬픈 현실이었다. 지리산에는 여러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모두 빨치산이라고 부른다.
최순호의 《가재 상흔(傷痕)·오래된 기억들의 방》
지금은 남원에서 떡장사를 하면서 독립언론을 꿈꾸는 조선일보 기자였던 최순호는 지리산 고기리 고개에서 육이오를 겪고 살아난 사람들을 인터뷰하였다. '가재'는 전북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가재'라는 고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50년 11월 20일 새벽 국군 제11사단 전차부대가 들이닥쳐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삽시간에 죽음으로 내몰았다. 최순호는 남원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인물들을 추적해 좌익계열 계보를 정리하면서 미군정 시절 한반도 최초로 미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남원사건'을 사료로 재구성했다.
11살 때 눈앞에서 아버지가 익사하는 것을 목격한 아들 차길진의 증언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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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의 아버지는 차경석이란 인물로, 증산교의 맥을 이은 민중 종교인 보천교(普天敎)의 창시자였다. 일찍부터 항일정신을 배운 차일혁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김학철 등과 함께 항일유격전에 참가한다. 민족주의자인 차일혁이 좌익계열인 조선의용대에 들어간 것은 당시 중국의 조선인 민족주의 세력들이 일본과의 무력투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귀국한 차일혁은 미군정의 보호를 받고 있던 악랄한 일본인 경찰 ‘삼륜’을 저격하고 수배되어 공장의 경비대장을 하던 중 전평의 총파업을 맞아 좌익노동자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우익의 선봉으로 나선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한이 3개월 간 인공 치하가 되자 유격대를 결성해 인민군과 싸우던 그는 경찰에 특채되어 이현상의 남부군과 맞서게 된다. 이념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좌우익 할 것 없이 반대편에 선 사람이라면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바퀴벌레 죽이듯 몰살시키던 시절이었다. 특히 친일파 출신 남한 군경의 잔혹함은 악명 높았다. 그러나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잘 알고 있던 차일혁은 경찰연대장으로써 빨치산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도 가능한 한 한 명이라도 살리려 애쓴다. 생포된 빨치산 중에는 그와 함께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동지들도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들을 전향시켜 경찰에 편입시켰고, 심지어 부상한 빨치산 간부에게 자신의 피까지 수혈해 준다. 적장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일혁의 남다른 인명존중의 정신은 극단적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남한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차일혁은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점, 생포한 빨치산들에게 남다른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 무엇보다도 과거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상적인 의심을 받게 된다. 진해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중 좌익 혐의로 이틀간 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에도 수사 대상이 되어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죽기 2주전, 그는 11살짜리 아들 차길진에게 이현상의 시신에서 찾아낸 가래 두 알을 자신의 유품이라며 건네주고, 1주일 전에는 ‘죽음도 삶의 연속이다’ ‘절대 벼슬을 하지 말라’는 등 유언 같은 말들을 남긴다. 사망 당일,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물놀이를 간 그는 어린 아들을 강 가운데 바위에 앉혀놓은 채 조선의용대 팔로군의 노래인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홀로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들은 엉엉 울며 아버지를 외쳐 불렀으나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신은 19시간 뒤, 곰나루 근처를 도강하다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은 자세로 발견되었다.” |
지리산 <하나명상센터>에서 온 생명살림을 기도하시는 장석열 목사님의 기록이다.
| “고향 친척들도 이현상의 시신을 거두기를 거절하였다. 다시 작전지역인 하동 화개장터에 내 패댕이 쳐진 시신을 화장한 후, 그의 화이바에 백골을 빻아서 강물에 뿌려주고 예포 3발을 쏘며 정중히 장례를 치러준 차일혁의 인간미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사상범으로 몰려 총경 옷을 벗고 경찰 간부직을 박탈시켰다. 충청도 고향에 돌아가 식음을 전폐하고 11살 아들 차길진이 보는 눈앞에서 물속으로 조용히 잠겼다. 차일혁이야말로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었다.”(장석열 저, 《외면당한 시대정신》 [서울: 도서출판 청진, 2024]) |
원경스님을 통해서 보는 해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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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님: 박헌영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손호철, [서울: 이매진, 2023])는 독립운동가이며 남로당을 조직한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설명이 되는 한 스님이 있다. 박병삼은 지리산 비트에서 비트 키퍼 어머니에게서 출생하였다. 자라면서는 이현상 손을 잡고 다닌 소위 “애기 빨치산”이다. 그의 삶은 원경 스님(1941-2021)이라는 법명으로 일생을 이념 갈등과 전쟁, 학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복판을 살았으며 그의 삶에는 ‘한반도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다.
혼외자, ‘빨갱이’ 자식, 소년 빨치산, UDT 요원, 북파 공작원 교관, 탈영병, 무술 고수, 한국판 강제 노동 수용소 국토건설단 단원, 음독자살 시도, 가명이 14개나 된다. 여러 사찰을 거처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끼지 거처서 2021년 12월 6일, 경기도 평택시 만기사에서 입적했다.
정치학자 손호철(서강대학교 명예교수)은 원경 스님과 모친 정순년이 생전에 한 구술, 현지답사, 인터뷰,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그리움의 족쇄를 끊으려 정처 없이 떠돈 한 영혼’의 80년 삶을 정리하여 2023년 12월 6일, 원경 스님 입적 2주기를 맞아 평전 《한 스님》을 출간했다 한다. 그러나 고인이 된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하여 세간에 그 기관이 빨갱이기관으로 매도되는 현실이다.
이상주의자로, 불같은 혁명가로 살다 간 아버지 박헌영과 다르게 원경은 박헌영의 아들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 현실주의자의 길을 택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상주의자 박헌영이 꾼 꿈을 복권하기 위해 현실주의자로 살아야만 했다. 이런 모습을 시대정신을 살았다고 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운명을 선택하는데 자유롭지 못한 정치적 현실을 피할 수 없다
전후 미·소 양세력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에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통일보다는 두 세력이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긴장감이 강요되었다. 그렇기에 남북한의 역사는 고난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리영희 선생의 표현으로는 ‘새는 좌우의 두 날개로 난다.’ 경계에 서야만이 양쪽을 볼 수가 있고 전체를 보아야 길을 찾을 수가 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중간세력을 거부하고 극단의 정치만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중간에서 시대정신의 과녁을 바로 보는 능동적인 정치 주체가 없어진 사회는 단세포적이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제로 섬>만이 지배하게 된다.
지금은 항일하면 빨갱이가 되고 통일하자면 더 빨갱이 취급을 받는 사회풍토 속에서 모든 정치인도 ‘항일’과 ‘통일’은 금기어로 상실해버렸다.
이해학(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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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기억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