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센트 반 고흐 <생레미의 풍경> (1889. 10, 생레미, 캔버스에 유채, 73.6×9cm,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인디애나폴리스)

생 레미 드 프로방스는 아를에서 북동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주전 6세기 고대 로마 시대에 시작되었고 중세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이 있다. 예언가로도 알려진 의사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고향이기도 하다.

빈센트는 생폴드모졸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1년을 머물렀다. 병원은 본래 982년에 세워진 수도원이었다. 빈센트가 이 정신병원에 온 것이 5월이었으니 계절적으로 가장 좋은 때였다. 그는 의사 페이론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과 주변 풍경을 둘러볼 수 있도록 선처를 청했다. 의사는 빈센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만 빈센트의 병증을 감안하여 혼자 다니게 한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이때 빈센트의 청이 무시되거나 거부되었다면 우리는 세기적 명작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페이론의 행동은 위대한 화가의 창작 활동 못지않게 훌륭하다. 비록 정신병원에 온 환자이지만 품부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선선히 협력한 페이론의 안목이 반갑고 그 따뜻한 마음씨가 고맙다.

빈센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143점의 보석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발작이 두려웠으나 틈틈이 찾아드는 평온함 속에 미친 듯이 그렸다. 울고 웃고 고함치고 침묵하면서 그렸다. 미치지 않고는 묘사할 수 없는 환상이 캔버스에 표현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꽃피는 아몬드 나무>, <아이리스>,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등 이제까지 예술사에서 볼 수 없던 명작이 쏟아졌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광석은 제련 과정을 거쳐 순금으로 모아진다. 고통은 인간을 생각하게 하고 현명하게 하며 영원성에 이르게 한다.

생레미에는 고대 로마의 도시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글라늄(Glanum)이 있고 그 입구에는 개선문과 영묘(Arc Triomphe & Mausolee)가 있다. 빈센트가 입원하고 있는 정신병원도 지어진 지 천년이 넘은 수도원이었다. 당시 생레미는 관광명소였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고대도시의 흔적은 빈센트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빈센트는 그 유적을 작품 속에 한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구름이 가득하여 변화무쌍하면서도 생기가 가득 찬 하늘이었고, 모진 인생처럼 굴곡지면서도 이어지는 산과 골짜기였으며, 그 아래 펼쳐져 생명을 노래하는 밀밭과 거기서 일하는 농부들이었다.

빈센트는 보이는 것을 다 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고 그리고 싶은 것만 그렸다. 자기 삶을 자기가 주도하였고 스스로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기계적 삶을 반복하며 남의 시선으로 자기 삶을 사는 이들은 빈센트를 이해하기가 벅차다.

<생레미의 풍경>(1889. 10)은 10월에 그린 풍경으로 6월에 그린 그림들과는 사뭇 다르다. 울퉁불퉁 굴곡진 거친 산 아래에는 봄부터 땀흘려 일한 농부의 수확이 한창이다. 분주한 손길이 영락없는 빈센트 자신이다.

화면 가득한 황토색은 그의 예술 세계에 추수기가 도래하였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그 인생의 가을을 재촉하는 듯하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고 언덕에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올리브나무가 보인다.

최광열(기독교미술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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