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와 고성에서 행복했던 순간들 ⓒ이해학 대표 제공

구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지리산 일대와 남도 앞바다를 함께 구경한적이 있었다. 좁은 시야로 앞만 보고 달리느라 어머니와 시간을 함께 나누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반성하며 남원, 운봉, 구례, 곡성과 강진, 해남 목포를 시나브로 돌았다.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보든지 심드렁하였다. “옛날에 니 아부지랑 함께 봤다.”라는 말만 하고 마른 눈물을 닦았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독백을 그냥 하는 말로 들었는데 옛날을 더듬어 곰곰 생각해보니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결혼한 지 몇 년 안 되어서 겨울철 삼 개월은 아버지를 따라서 봇짐장사를 하러 다녔다. 차도 없는 그때는 한 번 길을 나서면 구정 전에야 집에 돌아왔다. 내가 장돌뱅이의 아들로 세상에 왔다는 깨달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한 수의 시를 써서 어머님께 바쳤다.

우리 어머니
풍산면 청주 한 씨 꼿꼿한 집안
전주 이 씨 양반집이라고
열여섯에 시집 와서
쌀독 거미줄 다 걷어내고
그 많던 빚 문서 불태우고
논밭 스무 마지기 사서
그 소문 산 넘고 강 건너
수십 리에 호가 났네
서른여섯에 홀로 되어
백세를 넘긴 어머니와
쉽지 않은 효도 나들이
“어머니! 저기 바다 보셔요.”
어머니는 힐끗 쳐다보는 둥 마는 둥
“나는 니 아부지랑 바다란 바다는
원 없이 봐 부렸다.”
아! 어머니 바다는
아버지와 같이 본
그 바다 뿐!

아버지는 지게에 등짐을 지고 어머니는 봇짐을 머리에 이고 다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서 멀리는 바다가 있는 목포와 해남까지 갔고 가까이는 남원과 담양을 넘나들었다. 그리하여 스무 살 초반의 서너 번의 봇짐 행각으로 “집안의 빚을 갚고 두 시누이를 출가시키는 큰일을 해냈다”고 어머니 일기에 적었다. 돈 만드는 요령을 터득한 후로는 손수 짠 명주와 삼베, 면포를 순창장이나 남원장에 팔지 않고 직접 가지고 다녔고 때로는 손수 만든 버선도 봇짐에 넣어 가지고 다녔다.

아버지는 길 가다가 경찰의 눈에 띄어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으려고 상투를 틀고 탕건과 갓을 쓰고 남루한 마고자와 바지를 입고 수염을 부리부리하게 길러서 노인네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나 남루한 저고리에 몸뻬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은 초라한 아내를 앞세웠다.

시골로 갈 때는 집에서 짠 면포와 명주 외에도 옥양목과 포플린, 바늘과 실 동백기름 같은 화장품 등을 가지고 다녔고 목포에서 올라올 때는 멸치와 새우, 명태와 조기, 김과 미역 등을 도매로 구입하여 소매로 판매하며 올라왔다. 두 분은 남원, 운봉, 곡성, 구례를 한 바퀴 돌고 난 후에 담양, 화순, 영암, 해남, 목포로 돌아서 남원을 거쳐서 순창으로 나왔다. 한 번 길을 떠나면 구정 이삼일 전에 돌아와서 빚을 가리고 보름이 지나면 한 번 더 길을 떠났다.

1942년 만추에 할머니는 아들 낫기 위해 치성을 드려야 할 몸이 떠돌아 다니면 되느냐고 만류하였으나 아버지의 고집으로 집을 빠져나와 두 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행운이 잇따라 가는 곳마다 물건을 예정보다 일찍 떨이하게 되어 어디를 가든지 고깃국도 실컷 먹게 하였다.

 돌아올 때 목포 해물전에서 모처럼 값이 나가는 대구와 전복, 조기와 도미 등을 사서 행운을 시험하였다. 구정 전 집에 도착하기 전에 비싼 물건이 거의 다 팔려서 제수에 쓰려고 따로 간수한 것만 겨우 챙겨가지고 돌아왔다. 할머니는 떠날 때 보다 뽀얗게 살이 찐 며느리의 얼굴을 보고 눈을 치떴다.

▲ 어머니와 고성에서 행복했던 순간들 ⓒ이해학 대표 제공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며 섬진강에 은어 떼가 올라오고 한가위에 상수리가 툭툭 떨어질 때 동갑내기 우팔이와 화주, 봉선이와 칠순이가 세상에 차례로 와서 집집마다 금줄이 쳐졌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마을 분위기를 휘저었으나 공출을 강제로 배당 받은 어른들의 허리는 휘었고 언제 징병과 징용을 당할지 모르는 청년들은 대낮에 얼굴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 어른들은 긴장과 불안을 견디려고 밤에는 사랑방에 모여 화투를 치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술기운으로 불안한 시국 이야기를 떠들어대다가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에 흠칫 놀라며 서로 입을 다물었다.

일본이 미국과 싸워 이겼다는 말과 미국이 이겼다는 말이 동시에 돌아다니고 있어서 사람들은 어떤 것이 사실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금과보통학교 교사 박래은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한 죄목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다는 소식과 박 선생의 제자들인 순창 농림고학생들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일본에 유학 간 순창의 청년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 정도는 화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돌뱅이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고 급박하게 막 돌아가는 세상에서 자칫하면 자기가 징병이나 징용으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에 누이 동생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재난을 막으려고 급하게 중매를 부탁하여 순창의 정 씨에게 서둘러 시집을 보냈다.

나는 계미년, 1943년 양력 11월 3일에 삼신할머니에게 떠밀려 세상에 나왔다. 뒷산 상수리 나뭇잎은 다 지고 장독대 뒤 대나무 숲이 바람에 부딪히며 휘파람을 부는 한 밤 중 새벽 2시경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추와 숯을 끼운 금줄을 매달며 조상님께 제사를 받들 손자가 태어났음을 아뢰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위대한 학자가 되어 높은 벼슬에 올라 가문을 영화롭게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당 훈장에게 부탁해서 지은 이름 ‘해학(海學)’이가 나에게 잘 어울린다며 기뻐하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치성에 감동된 삼신할머니가 나를 점지하였다고 믿었으나 내가 액운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귀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천한 이름으로 귀신을 속여야 한다며 ‘해불개’라는 아명을 지었다. 세 이레가 지나고 금줄을 걷고 백설기와 수수경단을 이웃들과 나누었다.

내가 백일을 맞이하였을 때 할머니는 삼신상에 흰밥과 미역국을 차려놓고 나의 무병장수와 복을 빌었다. 그리고 나를 종일 어르며 사람들에게 삼신할머니가 점지한 특별한 손자라고 자랑하였다. 할머니는 이씨 문중 사람들이 산모에게 축원하는 모든 인사를 혼자 다 가로채버렸다.

어느 날 할머니는 아버지를 강제하여 기어코 아기를 위한 액막이와 무병장수 굿을 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액운을 다 막아서 아기가 백세를 무병장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나는 돌 전에 압세기(수두)에 걸렸고 죽음에 문턱에 이르렀다. 아기가 하루 이틀 열이 나서 젖을 빨지 못하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몸 전신에 빨간 홍반이 여기저기 생겼고 빨간 땀띠가 돋았고 그것이 물집으로 바뀌고 물집 속에 핏물이 고이면서 피부가 곪아 터졌다. 작은 몸이 고통으로 바트며 앙상하게 야위었다.

아기가 기침을 강그라지게 하며 오죽이나 울어댔으면 이웃에 사는 안티 당숙모가 와서 보고 어머니를 따로 불러서 “질부, 서운하게 듣지 마소. 아기가 영 시원찮으니 포기하소. 아기 때문에 질부까지 죽게 생겼소”라고 충고하였겠는가! 어머니는 그 때 마음고생이 너무 커서 내가 죽으면 따라 죽으려고 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였다.

어머니의 일기뿐 아니라 내 등에는 지금도 곰보 흉터가 퍼져있어 내가 죽음에서 나았다는 증표가 있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이 치료차 우리 집 문턱을 넘나들었는데 할머니는 당신의 치성으로 삼신할매가 낫게 하였다 하고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쓰시기 위해 미리 준비하셨다고 설명하신다.

나는 안다. 나의 출생의 비밀은 부모님의 장똘뱅이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짐을 지고 할머니를 떠나지 않았으면 내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이것을 하나님 은혜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 팔베개에 누워서 어린 양을 부리며 어머니 젖가슴을 만졌다. 어머니는 “내 강아지! 내 강아지!” 하면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즐거워하며 까르르 깔깔 웃을 때 할머니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빨리 인나. 할미랑 자야지.” 하면 나는 못들은 척하고 어머니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할머니는 나를 끌고 나왔고 나는 밤새도록 아버지와 어머니가 와서 나를 구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할머니는 내 입에 쭈그렁젖을 물려주며 “우리 해불개! 내 새끼! 할미랑 자자” 하면서 행복해 하였다.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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