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파밍 복음 시대, ‘세로토닌 영성’과 ‘아드레날린 신앙’
내년 2024년 트렌드 변화 가운데 하나가 도파밍(On Dopamine Farming)입니다. 도파민(dopamine)과 파밍(farming)을 결합한 말입니다. 도파민은 쾌락을 주는 신경전달물질이고 파밍은 게임 용어로 플레이어가 게임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농작물을 수확하듯 아이템을 모으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도파밍은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도파민이 분출되는 행동이라면 뭐든 시도하고 모아보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결국 엉뚱하고 기발하고 지극히 무의미한 일들이 시선을 끌고 ‘역대급 도파민’이 매번 기록을 경신합니다.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1)가 범람하는 오늘날 도파밍은 피할 수 없는 추세입니다. 신앙도 이렇게 재미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도파민은 인간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시만, 새로운 자극에만 분비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좇게 만듭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세로토닌(serotonin)입니다. 세로토닌은 마음을 편히 갖고 명상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나오는 호르몬입니다. 도파밍 시대에 종교가 쾌락을 좇아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봉사를 통해 세로토닌을 분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영성의 회복입니다. 이렇게 도파밍 복음 시대에 대항하는 ‘세로토닌 영성’과 신앙이 한국교회에 놀라운 질적 부흥을 만들 것입니다.
이왕 신경전달물질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인간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도 있습니다. 아드레날린입니다. 인간은 스트레스나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뇌의 특정 부위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됩니다. 그리고 아드레날린은 혈액 순환을 통해 신체의 다양한 조직과 장기에 전달되어 신체의 반응을 촉진합니다. 심장 박동수와 혈압을 증가시키며 근육의 혈액 공급을 늘리는 등의 생리적인 변화를 유발합니다. 이렇게 아드레날린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신체의 반응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실 뇌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은 과거 수렵시대에 인간이 빨리 도망가거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지만, 현대에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세로토닌이 분비될 때와 달리 몸이 긴장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리적 변화는 긴장 상태에서 효과적으로 위험과 공포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도파밍 복음 시대에 대항하는 ‘아드레날린 영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두려워하는, 곧 경외하는 영성입니다. 따라서 도파밍 복음의 시대에 세로토닌 영성과 아드레날린 영성이 한국교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2.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포입니다!
일찍이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삭 제물 사건을 공포로 읽은 것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공포는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칸트식 세속적인 휴머니즘과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이 사건을 신앙적 차원으로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로 해석하는 일반적인 해석과도 다릅니다. 또한 신에 대한 ‘인간의 조건 없는 굴복’과 ‘여호와 이레’라는 예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피엔딩 역시 키르케고르 입장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키르케고르는 이 사건에서 신앙이라는 것이 자신의 실존을 파괴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앙은 나를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고, 나를 아들을 살해하는 ‘살인자’로 만들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화된 교회가 약속하는 위안이나 안락, 곧 도파밍 복음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신앙은 나를 공포와 전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렇게 나의 실존을 파괴할 수 있는 칠흑 같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신 앞에 공포로 마주 서는 것입니다. 좋은 말로 ‘신 앞에 선 단독자’입니다. 코람데오입니다. 이것이 아드레날린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차원에서 마음을 편히 갖고 명상하고 기도하며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로토닌 영성입니다. 결국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시작은 키르케고르의 ‘공포 앞에 선 나약한 인간’으로, 그리고 봉사하고 섬기는 일꾼으로 귀결됩니다.
▲ 티치아노 베첼리오 <이삭의 희생>(1543) |
그러나 제2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나의 공포’가 ‘우리 모두의 공포’로 나가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했던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작품 <이삭의 희생>(1543)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머리를 잡고 칼로 치려는 순간, 천사가 급하게 제지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림의 중심은 아브라함의 무릎 옆 이삭의 얼굴입니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죽임당하기 직전 이삭의 얼굴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공포뿐 아니라, 아들 이삭의 공포도 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공포는 물론, 타자의 공포에도 민감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터, 키르케고르, 불트만으로 이어진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서양 신학의 실존적 인간 이해에서 공동체적 인간 이해로 신앙 고백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2의 종교개혁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신 앞에 선 공동체’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삭은 구원받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공포를 넘어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가 다시 복원되는 것입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신앙이라는 폭력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본문 말씀은 제2 종교개혁인 신 앞에 선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복음서에서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바리새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서신서 말씀은 공동체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곧 도파밍 복음으로 바꾸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구약 말씀에서 학사인 에스라 제사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는(심판 주 하나님 앞에서 공포와 전율을 느끼는) 아드레날린 신앙이며, 순종하며 말씀을 따르고 봉사하는 세로토닌 영성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3.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막 12:13-15a)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하고 상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진리가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 실족하게 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뿐이었습니다. 헤롯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납세(인두세)(2)를 찬성하는 친 로마적인 헤롯당과, 로마와 같은 이방인의 통치를 부정하고 납세를 반대했던 바리새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적대적인 이 두 그룹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서로 하나가 됩니다. 적의 적은 동지인가요? 아무튼 이 두 적대적인 그룹은 사람을 보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물어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민족의 배반자로 몰아갈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헤롯당은 예수님이 반란을 선동했다고 로마 총독에게 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초대 황제 가이사의 데나리온과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데나리온 |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5b-17)
예수님은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백성들의 대변인처럼 말하고 있지만, 속에는 사악함 밖에 없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세금 내는 데 쓰는 로마의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성경에 포도원 품꾼의 하루 품삯 정도의 금액입니다(로마 군인, 혹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도 하지만 유동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3)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며 헤롯당의 올무에 걸리지 않는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자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만 아니라, 초대 교회 때도 그렇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제멋대로 왜곡합니다. 따라서 서신서 말씀에서 유다는 하나님께서 ‘믿지 않은 이스라엘, 불손종하는 천사들, 사악한 소돔과 고모라’를 어떻게 처벌하셨는가를 상기시키며 힘써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3-4)
유다는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공동체에 가만히 들어 온 몇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 곧 도파밍 복음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로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적 지식을 중요시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영을 중요시하고 육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들은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도 영만 거룩하고 깨끗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유 1:5-8)
유다는 영지주의자들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육체에 근거하지 않고 영적 환상만 쫓아다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영만 거룩하고 육체를 부정하여 정욕대로 살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 영지주의자는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만 옳다고 여깁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합니다. 결국 불의한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할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9-10)
잘 아시겠지만, 모세의 무덤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신 34:6b)”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묘가 우상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모세가 죽었을 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장사할 때, 마귀가 나타난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죽음을 알리고 거대하게 장례식을 치르고 무덤을 피라미드처럼 거창하게 만들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무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유다는 천사장 미가엘이 마귀를 꾸짖었던 것을 소개합니다.
이때 비방하는 판결이 아니라, 그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단은 토론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꾸짖을 상대입니다. 사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것을 비방합니다. 결국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것 때문에 멸망합니다. 도파밍 복음의 결과입니다.
5.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라!
이렇게 도파밍 복음의 시대에, 자기 육체를 더럽히며 교회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는 거짓된 신앙, 불의한 영성이 판치는 시대에 참된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참된 개혁의 시작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스 10:5-7)
본문 말씀은 유다 백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영적 개혁 운동을 단행한 학사 에스라 제사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배경을 살펴볼까요? 에스라는 하나님의 전 앞에서 엎드려 울며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이렇게 에스라는 그에게 주어진 종교적,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으고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말대로 말씀에 순종하기로 맹세하고 에스라의 개혁은 탄력을 받아 계속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 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스 10:8-12)
에스라는 사흘 동안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이방 여인을 아내나 며느리로 삼은 것을 끊어 버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들어온 이들, 곧 이방 여성들을 끊어 버리는 것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진실한 신앙 공동체를 파괴하는 불의한 이들을 내쫓을 때 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처럼 도파밍 복음이 아니라 세로토닌 영성과 아드레날린 신앙으로 제2의 종교개혁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 신앙 공동체를 흔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도록 유혹하는 사탄·마귀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
(1) MZ세대를 축으로 짧게는 몇 초, 길게는 10분 정도의 영상으로 빠른 장면전환과 재미를 추구하는 콘텐츠로 유튜브의 쇼츠, 인스타의 릴스, 틱톡 같은 짧은 영상을 말한다. (2)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은 인두세로, 사람의 머릿수에 따라 부과하는 세금이다. 로마 정부는 모든 성인에게 인두세를 부과했는데,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와 종에게도 부과했다. 따라서 로마는 인두세를 책정하려고 정기적으로 인구 조사를 시행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인두세를 책정하려고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호적 명령을 내렸다(눅 2:1, 행 5:37).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보낸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한 세금 제도는 바로 인두세에 관한 것이었다. (3) 예수님 당대에 생존해 있던 로마의 황제는 티베리우스(디베료) 황제이기에 동전의 얼굴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데나리온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주화 전문가인 케빈 버처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황제의 초상이 들어간 은화는 유대에서 통용된 적이 없기에 예수님이 언급한 데나리온 은화는 보다 초기의 것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이사, B.C. 63~A.D. 14)의 초상이 들어간 은화라고 한다. 그는 로마 제국의 건국자로 초대 황제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가 암살된 뒤 사후 입양되어 아들이 되었다. 이후 시저 암살단과의 국내 외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얻고 제국을 건국했으면 200년간 소위 로마의 평화 시대(팍스 로마나)를 몰고 왔다. 아기 예수의 탄생 직전, 로마와 식민지에 호적 칙령을 내려 마리아와 요셉이 베틀레헴으로 가게 한 이가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였다. 이후 티베리우스를 입양했으며 자신을 이어 두 번째 황제로 세운다. 갈릴리 호수는 주후 20년 경에 헤롯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 디베랴 호수로 불렸고, 호수 근처에는 디베랴라는 도시도 세웠다.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