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공동체론> 열네 번째 강의는 책임교수인 이찬수 선생이 강사로 참여해 공동체의 의미, 아시아공동체의 가능성, 공동체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평화의 개념 재규정 등에 대해 강의했다. 다음은 이찬수 교수의 강의를 정리한 내용이다.

이찬수 교수 ⓒ에큐메니안

아시아의 공동체와 평화

한자로 말하면, 공동체란 같음(同)을 공유(共)하는 집단이다. 영어로는 ‘커뮤니티(community)’다. 무언가 어떤 단일성(unity)을 함께 한다(com)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로 공동체란 어떤 단일성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핵심은 같음 자체보다는 같음을 함께 공유하는 데 있다. 공동체란 또한 오직 나만 주장하지 않고 서로가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또 좋아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럽의 공동체를 보자. 유럽은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가톨릭+개신교)라는 비슷한 문화를 공유해온 측면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유럽의 기독교 문화만큼 큰 영향력을 끼치는 단일한 종교 문화적 전통은 없다. 물론 동아시아는 유교문화가 제일 크지만, 유럽의 기독교문화 만큼은 아니다. 불교문화의 영향력도 작지 않고, 근대에는 기독교 문화까지 들어와 제법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시아의 남쪽으로 가면 불교, 이슬람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유럽처럼 상호 소통하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에서 같음을 함께 한다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공동체가 ‘동’을 ‘공유’하는 집단이듯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을 찾아서 넓혀가는 데서부터 공동체는 이루어진다. 공유하는 부분을 넓혀가는 과정이 상호 수용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고, 평화를 이루는 과정이기도 하다. 평화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나눠보고자 한다. .

‘평화’에 대한 편견 : 평화는 복수다

간혹 경제적인 여건이 좋아서 일정 기간 평화를 누린 개인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역사상 사회와 세계 전체가 평화로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전래 동화 속 신화적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이가 두고두고 평화를 누렸다거나 누리고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평화는 그 정도로 어렵다. 왜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평화라는 말은 같은 것 같지만, 평화에 대한 개념이 저마다 다르고, 평화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해야 하며, 사람들이 평화를 왜 다 다르게 생각하는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평화를 얘기해야하는 이유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공동체를 얘기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이기적 개인주의 같은 것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상황을 꿈꾸기 위해 우리는 평화와 공동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려면 일단은 서로의 입장을 긍정해야 한다.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평화’라는 말은 단수처럼 쓰이지만 실제 사용되는 모습은 복수다. 여러 가지 ‘평화들’이 있는 것이다. 서로의 ‘평화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평화에 대한 인식들

세계적인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에는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인 평화(positive peace)가 있다고 한다. 우선 주먹질이나 전쟁 같은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라고 한다. 하지만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로운가?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남북관계의 경우 법적으로는 종전 상태가 아니라 휴전 상태다. 직접적인 전쟁이 없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끝없이 갈등이 있고 긴장이 있다. 

반면, 적극적인 평화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조차 없는 상태다. 내가 어떻게 하려 해도 하기 힘든 구조적 폭력에 우리는 시달린다. 현재 어찌 보면 청년 세대는 기성 세대보다 사는게 더 힘들다. 취업이 힘들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그다지 없다. 여러분의 아버지 세대이 기성세대가 여전히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청년들은 사회의 중심축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 또한 아직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성차별 문화도 구조적인 폭력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이 점에서는 많이 바뀌어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여러 면에서 주도적일 수 없는 문화다. 이런 것 마저 없어야 적극적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

그런데 가만히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폭력이 과연 없어본 적이 있었을까.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조차 없다는 말 자체가 너무나 공허할 정도로 이상적이지 않는가? 그런 평화는 우리가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좀 더 현실감 있는 규정이 필요하다. 이 때 내가 생각해본 새로운 정의가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평화는 폭력이 없는 하나의 ‘상태(state)’가 아니라,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process)’이다. 현실은 항상 무언가가 변하기 마련이다. 평화도 하나의 굳어진 상태가 아니라 변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 변화를 폭력을 줄이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의 한자의 의미는 사나운(暴) 힘(力)이다. 라틴어 어원대로 하면 힘의 위반, 즉 힘의 불균형으로 누군가 피해를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피해를 줄여가는 과정이 바로 평화다. 사나운 힘, 더 큰 힘이 작은 힘에게 무섭게 대하고, 작은 힘은 무서워서라도 말을 듣게 되는 것, 이러한 힘의 불균형이 지속되는 구조가 폭력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다 나타난다.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 얼마나 인류가 해야 할 얼마나 근본적이고 거대한 작업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폭력을 어떻게 줄일까?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단계를 셋으로 구분한다. 평화유지(peace keeping), 평화조성(peace making), 평화구축(peace building)이다. 

평화유지(peace keeping)는 기본적으로 힘의 불균형을 인정하고 그 이상의 폭력이 나오지 않도록 이 상태를 유지하자는 관점이다. 소위 힘이 있는 사람들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긴장은 있더라도, 물리적 폭력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이 세계경찰을 자임하면서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데, 힘 있는 미국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태가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상태의 유지가 평화유지다. 물론 갈등은 지속된다. 

평화조성(peace making)은 이러한 갈등이 실제로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상호 협정이나 조약 같은 것을 맺어서 좀 더 안전하게 지내자는 것이다.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두면, 아무래도 감시망도 커져서 서로를 침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고,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이것이 평화조성이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서도 사회는 구조적 폭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평화구축(peace buiding)은 오해를 줄이고 교류를 확장하며 구조적 폭력도 없애가자는 것이다. 서로를 승인하는 문화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것이 ‘적극적 평화’를 이뤄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금 공동체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바꾸어 말하면 평화를 구축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양극화를 그대로 두지 않고 서로의 아픔을 수용해 공유의 폭을 확장해간다면 그것이 적극적 평화를 이루는 길이고, 공동체를 이루는 길이다. 

그래서 공동체를 얘기한다는 말은 지금 현실은 비공동체적일 뿐만 아니라 폭력적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은 상호 갈등이 아니라 상호 수용을 통한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고, 폭력을 줄여나가는 과정이다. 공동체의 ‘공’, 즉 ‘함께하는’ 것이 평화의 핵심이다. 힘의 불균형을 줄이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공감과 타자지향적 공감

이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공감이다. 공가(共感)은 함께 느끼는 것이다. 아픔에 대한 공감 없이는 아픔이 줄어들지 않는다. 공감에도 두 종류가 있다. 타자의 형편을 먼저 떠올리며 타자에게 나아가는 타자 지향적 공감(영어 empathy에 가깝다)과 타자가 자신의 느낌에 맞추어주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공감(영어 sympathy에 가깝다)이다. 타자지향적 공감은 타자의 아픔에 내가 맞추어주는 것이고, 자기중심적 공감은 자신의 아픔에 타자가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둘 다 필요하지만, 자기중심적 공감은 타자에 대해 자칫 폭력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가령 상대도 내 느낌과 같은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다가 성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타자지향적 공감은 영어로 ‘empathy’에 가깝다.(엄밀하게 일상 회화에서는 sympathy와 empathy가 구분되지 않지만...) 이것은 상대의 아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 중심적으로가 아니라 아픔을 당하는 타자 중심으로 공감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실 종교의 한계

그런데 현재의 조직화된 종교들은 대부분 자기중심적 공감에 익숙하다. 기독교인의 사랑과 비기독교인의 사랑을 구별 또는 차별하고, 결국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람을 배제한다. 한편에서는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갈라디아서 3:28)’라며, 혈연, 신분, 성별과 관계없는 인류의 원천적 일치성에 대해 선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부사적 수식어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크다. 평화라는 이름의 배제, 즉 폭력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판단의 기준을 너에게 두지 않고 나에게 두기 때문이다. 나를 넘어서는 것이 종교적인 것의 핵심이다. 

이걸 가장 잘 가르쳐준 최고의 가르침이 불교다. 불교의 핵심은 나를 넘어서는 ‘무아’다. 부처님은 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부처가 된 것이다.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나도 너로 인해, 즉 나도 부모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남자는 여자로 인해 존재하고, 1 없는 2는 없고... 이런 식으로 내가 있기 위해서는 너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너 없는 나라는 것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무아(無我). 한결같이 ‘나’를 채우려고 바둥거리는 데, ‘나’가 없으니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이 사라지니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물론 교단으로서의 불교는 자기 교단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결국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 할 때가 많다. 현실 종교는 가능성도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인다. 

폭력과 줄이는 과정과 공감을 통한 공동체의 근간

평화는 절대로 단기간에 되지 않고 복잡하고 오래 걸린다. 권력자는 절대 자신의 권력을 먼저 나누거나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의 권위, 즉 진정한 주권을 추구해나갈 수밖에 없다. 아시아공동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조직과 단체보다는, 한사람 한 사람들 간의, 민대 민 단위로서의 교류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오해를 풀어나가고 소중함을 알아가야 한다. 물론 적극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회에 맡기지 말고, 지역에 기반한 직접 민주주의를 이루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권력자들도 이 흐름들을 의식해서 조금씩 바뀔 것이다.

공동체의 핵심은 조화다. 조화의 다른 말은 평화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폭력은 서로의 아픔을 공감할 때 줄어든다. 공감도 자기중심적인 공감이 아니라, 타자지향적 공감이어야 한다. 이럴 때에 공동체의 근간을 이뤄갈 수 있다. 

이찬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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