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긴 것은 궁서체로 나타내겠습니다. -필자주-

세종 어진

독서광 세종은 실록도 읽으려 했습니다.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변계량에게 협조를 구했습니다. 변계량은 말렸습니다. 그러면서 ‘당대 사람들이 봐서는 절대로 안될 내용’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태조실록>에는 비밀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신과 하윤(河崙)이 알고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세종 7년 12월 5일.

변계량과 하윤(河崙)만이 아는 일, 실록청의 다른 사람은 모르는 일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제가 해석했을 때 그것은 왜곡, 날조입니다. 변계량과 하윤에게 역사의 왜곡, 날조는 태종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였겠지요. 신생 왕조 조선을 위한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옳은 일은 아닙니다. 하윤과 변계량이 <태조실록> 실록청에 쏠린 최고 권력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계량의 대꾸는 세종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포기할 세종이 아닙니다. 원로대신들을 구슬려 뜻을 이뤘습니다. 

<태조실록>을 보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상의하였더니, 유정현(柳廷顯) 등이 ‘조종이 정해 놓은 법에 의거하여 조종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하는 것이 실상은 아름다운 뜻이 된다.’ 하므로 이에 볼 수 있었다. -세종 20년 3월 2일.
  
유정현(柳廷顯)은 태조 즉위 교서에 명기된 고려 유신 56인에 포함된 인물입니다. 유정현은 그 자랑스러운 기록을 세종에게 보이고자 했을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고려 유신 경력은 태종 재위기에 이미 명예로 인식됐습니다. 관직사회에서 고려 유신 경력은 충절의 증표로 통했다고나 할까요. 유정현은 세종 8년 5월에 졸했습니다. 변계량이 7년 12월에 말렸던 것을 감안하면, 세종이 <태조실록>을 열람한 시기는 8년 봄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세종은 재위 20년에 3월에 가서 왜 그 일을 얘기했을까요? <태종실록>으로 손을 뻗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태조실록>을 열람하고도 별일 없었으니 <태종실록>도 괜찮지 않겠느냐? 신료들의 반대에 세종은 뜻을 접어야 했습니다. 

태종 실록

대신 황희, 신개 등이 모두 말하기를,
“역대 임금으로서 조종의 실록을 본 사람이 있을지라도 본받을 것은 아닌가 합니다. (중략) -<태종실록>을-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이며, 신 등도 또한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세종 20년 3월 2일.  

신료들의 심적 부담에 있어 <태조실록>을 열람하는 것과 <태종실록>의 그것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세종의 중신들은 태조 치세에 나이가 어렸거나 직급이 낮아 <태조실록>에 들어있는 내용에 꿀릴 게 없었습니다. <태종실록>을 두고는, 달랐습니다. 태종 재위기에 발생한 각종 의혹사건에서 세종의 중신들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황희만 하더라도 태종의 비서실장 직을 4년 동안 맡았던 이력 탓에, 태종 재위기에 일어난 여러 의혹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악성 루머가 떠돌기도 했습니다.

희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孽子)이었다. (중략)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중략)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와 이때 간통하였으며 -세종 10년 6월 25일. 

실록은 당대 역사 기록입니다. 당대성으로 하여 실록청이 설치됐다 하면 고위관리들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사초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 공자는 <춘추>에 본인 사망 2년 전까지의 노나라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춘추>도 당대 역사 기록이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공자는 제자에게 이런 내용의 말을 남겼습니다.
 
내 사후에 누가 나를 칭찬하면 그것은 <춘추> 때문일 것.
내 사후에 누가 나를 욕한다고 해도 <춘추> 때문일 것. 

정인택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