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긴 것은 궁서체로 나타내겠습니다. -필자주-

실록은 ‘실제로 있었던 일의 기록’의 줄임말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그것은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작성된 사초가 증언합니다. 사초를 작성한 사관이 실제로 보고 들었다면, 증언의 신빙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현대 역사가들은 아래 두 가지를 사료의 신빙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적용합니다.

  당대사 : 사건이 일어난 때와 가장 가까운 시기의 사료
  현지사 : 사건이 일어난 곳과 가장 가까운 지역의 사료
 
실록은 임금의 언행을 실제로 보고 들은 역사 기록입니다. 사초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편전 -임금의 집무실- 좌우에 사관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편전에 사관의 자리가 둘이었던 것은, 사관 중 한 명이 용변 보러 간 새에 임금이 측근과 밀담을 나눌 틈도 허용치 않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임금이 편전을 나서면, 사관도 따라 움직였습니다. 사관들은 이동 중에 글을 쓸 수 있도록 속기(速記)의 다양한 요령을 개발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왕도정치의 근간이 실록 시스템이라 생각했습니다.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서 세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였다. (중략) 원컨대,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좌우에 입시(入侍)하게 하여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참예해서 듣도록 하소서. -태조 1년 9월 14일.

태조 1년 9월은 이성계가 즉위하고 두 달밖에 안된 시기였습니다. 성리학을 국시로 새 왕조를 개창한 신료들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임금이라도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일거수일투족이 사초에 기록돼 후대에 알려질 것인 즉. 그러나 실록 시스템이 처음부터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사에 숨기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던 태종 이방원은 춘추관의 현직 사관을 가까이 두는 것을 꺼렸습니다.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 등이 상서(上書)하여 편전(便殿)에 입시(入侍)하기를 청하니,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태종 4년 9월 16일.

사관의 입시를 장기간 금하기도 했습니다. 
 
금년 3월 이래로 사관(史官)의 한때 실례(失禮)로 인하여 좌우에 나오지 못하게 하시니 -태종 10년 10월 29일.

위 인용문에 의하면, 태종 10년에는 3월부터 10월말까지 7개월 이상 사관이 편전에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사초를 수거하여 내용을 검열하기도 했습니다. 임금이 사초를 검열하는 환경에서는 정론이며 직필은 기대난망입니다.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역사 기록이 빌미가 된 옥사(獄事)를 사옥(史獄)이라 합니다. 지금부터 조선의 첫 번째 사옥으로 역사에 남게 된 사건의 전말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사옥의 피해자는 이행(李行)입니다.

사헌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 이행(李行)이 일찍이 공양왕(恭讓王)의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직책이 사관 수찬(史官修撰)을 겸했는데도 -태조 2년 1월 12일.

지신사(知申事)는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나중에 승정원으로 기구가 확대되고, 승정원의 수장 도승지(都承旨)가 지신사 직을 이었습니다. '직책이 사관 수찬(史官修撰)을 겸했'다는 것은 지신사가 사관의 소임도 겸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신사는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직책입니다. 업무의 특성상 사초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아래는 위 인용문에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에게 아첨하여, 우리 주상 전하께서 신우(辛禑), 신창(辛昌)과 변안열(邊安烈)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썼사오니, 청하옵건대,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국문(鞠問)하여 논죄(論罪)하소서.”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태조 2년 1월 12일.

이행이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에게 아첨’했다고 돼 있습니다. 하면 이행은 고려 유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사헌부에서는 이행의 ‘직첩(職牒)을 회수’하라고 주청했습니다. 이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던 당시 이행은 조선의 관리 신분은 유지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기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사헌부에서 이행의 사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현직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것이 사헌부 본연의 소임이라 할지라도 춘추관에 출입할 권한은 없습니다. 춘추관은 임금도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사헌부에 앞서 이행의 사초를 문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준.

조준(趙浚)이 춘추관(春秋館)에 앉아서 고려 왕조의 사초(史草)를 보다가 이행이 기록한 글에, “윤소종(尹紹宗)이 이숭인(李崇仁)의 재주를 꺼려서, 조준에게 알려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 는 말이 있음을 보고 (중략)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임금에게 고(告)하니 -태조 2년 1월 12일.  

<고려사>를 펴내던 시기였습니다. 조준에게는 춘추관 출입 자격이 있었습니다. 조준이 내부 고발자였습니다. 
 
조준이 해〔日〕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윤소종의 말을 듣고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해가 증명하고 있다.” -태조 2년 1월 12일. 

조준은 본인이 이숭인을 해치려 했다는 이행의 사초에 하늘의 해를 걸고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당일 기사에서 조준의 억울함은 뒷전이었습니다. 현직 임금 태조 이성계의 억울함이 우선이었습니다.

임금이 명하여 무진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한 1388년- 이후의 사초(史草)를 바치게 하고서, 친히 이행의 기록한 것을 보니 -태조 2년 1월 12일.

▲ 태조 이성계 어진

태조는 이행의 사초만 검열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화도회군 이후의 모든 사초를 편전에 들이게 해 검열했습니다. 그런 연후 태조는 이행의 사초에서 본인과 관련된 부분을 해명했습니다.

-변안열의 처형은- 공양왕이 문득 목 베기를 허가했으므로, 내가 미처 이를 중지할 것을 청하지 못하였으며 (중략) -우왕, 창왕의 처형을- 공양왕이 이를 윤허했으니, 나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태조 2년 1월 12일.

태조의 해명은 진심일 수 있습니다. 전쟁터의 적을 무수히 죽였던 이성계였습니다. 이성계가 전장을 내달리며 휘두른 칼, 쏜 화살에 숨이 끊긴 적의 수가 천명도 넘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래는 <용비어천가> 40장의 내용을 필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당 고조 이연은 화살 70개를 적 70명의 몸에 맞췄다. Good!
  조선 태조 이성계는 화살 70개를 적 70명의 얼굴에 맞췄다. Perfect!

그 이성계가 정치판의 적에게는 관대했습니다. 어떻게 관대했는지는, 뒤에 수차 언급될 것입니다.

'고려 → 조선' 교체기였습니다. 유언비어가 난무했을 것입니다. 이행의 사초에는 그러한 시대 상황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내용적으로 위험한 사초였습니다. 춘추관에 드나들 자격을 지닌 이들 중 누구든지 사초 내용을 외부로 흘렸다 하면, 사초 작성자 이행은 탄핵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행의 사옥을 다룬 기사에는 옥에 갇힌 이행이 조사 과정에 어떤 해명을 했는지, 그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이행에게 내려진 징벌의 내용만 간략하게 실었습니다. 이행은 용케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이행(李行)에게 장(杖) 1백 대를 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울진(蔚珍)으로 귀양보냈다. -태조 2년 3월 21일. 
 
유배 기간은 짧았습니다. 1년 6개월 뒤에 이행은 관직에 복귀했습니다.

임금의 탄신(誕辰)이므로 (중략) 이행(李行), 이첨(李詹)의 유배와 이인임(李仁任), 조민수(曺敏修)의 금고(禁錮를 풀어 주고서 직첩을 모두 돌려 주었다. -태조 3년 10월 11일.

이후 이행의 관직 생활은 순탄했습니다. 하지만 사관들의 뇌리에서 이행의 사옥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한편 이성계는 재위 말년에 접어들어 본인 즉위 이후의 사초도 열람하려 했습니다. 그에 춘추관의 젊은 사관들이 연명상소로 부당함을 지적했습니다.

조준 등이 (중략) 전하의 임신년(壬申年)-조선이 개국한 1388년-으로부터 그 이후의 사초(史草)를 거두어 임금이 보도록 바치고자 하니, 사관(史官) 신개(申槪) 등이 소(疏)를 올리었다. -태조 7년 6월 12일.  

이때 이성계는 이행의 사초를 사례로 들며 반론을 폈습니다.

이행(李行)이 일찍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을 때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 또한 바르지 못했으니, 그 외의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이야기한 말을 다 알겠는가? -태조 7년 6월 12일.

이행이 공양왕의 지신사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성계는 지신사 직책을 맡았던 이행도 임금과 신하 간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제대로 몰랐다고 했습니다. 지신사 이행의 사초도 사실과 다른 것이라면, 일반 사관들의 사초는 굳이 말할 게 못됩니다. 태조는 기왕에 완성된 공민왕 이후 실록도 믿지 못하겠다며 그것도 바치라고 명하였습니다.

고려 왕조 공민왕으로부터 그 이후로는 이미 편수한 역사와 임신년 이후의 사초(史草)를 가려 내어서 바치게 하라. -태조 7년 6월 12일.

<필자 소개> 정인택 1961년 경북 안동 生 소설가 <위험한 질주>로 등단 단편집 <뽕짝 병원 이야기> 장편 <남자의 가정>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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