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긴 것은 궁서체로 나타내겠습니다. -필자주-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에는 즉위년이 없습니다. 즉위년이 있는 최초의 실록은 <세종실록>입니다. 신하 이성계가 임금으로 신분을 바꾼 날은 태조 1년 7월 17일이었습니다. 이날 태조는 즉위식을 거행하고 임금으로 업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 1년 7월 17일.

할 일이 태산 같았을 것입니다.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 조선 창업의 주역들은 몸뚱이가 둘이라도 모자랄 판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듯합니다. 그런 마당에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도 시간을 쪼개야 했습니다.

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정도전(鄭道傳), 예문관 학사 (藝文館學士) 정총(鄭摠), 박의중(朴宜中), 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소종(尹紹宗)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게 하였다. -태조 1년 10월 13일.

이성계의 신분이 왕으로 바뀌고 채 석 달도 안 되는 기간이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태조가 영을 내린 것처럼 돼 있습니다. 실질적적으로는 신료들이 먼저 얘기를 꺼냈을 것입니다. 고려의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그 막중대사를 깜빡 잊고 지나칠 뻔했다고. 아래를 보면, 470여 년에 이르는 고려의 통사를 2년 3개월 만에 끝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과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 등이 (중략) 37권의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여 바치니 -태조 4년 1월 25일

2년 3개월은 조선의 웬만한 임금의 실록을 펴내는 기간보다 짧은 편입니다. 졸속이라는 비난은 면할 길 없습니다. 사료를 수집하기에도 태부족한 기간이었으니 말입니다. 무언가에 쫓긴 것이 분명합니다. 대체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는지 …….

그건 그렇고, 시작할 때 서열 1위였던 조준(趙浚)의 이름자가 완성을 알리는 기사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위 정도전이 조준을 밀어낸 것일까요? 아래를 보면, <고려사> 편찬 중에 다른 사정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준 등이 고려 왕조의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공양군(恭讓君) 때까지는 이미 <실록(實錄)>을 편수(編修)했으므로 -태조 7년 6월 12일.

저는 일이 이렇게 흘렀다고 추측합니다.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의 실록도 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그에 역할을 나눴습니다. 실록은 조준이, <고려사>는 정도전이 사업을 총괄 지휘하는 것으로. 그런데 위 인용문에 눈에 띄는 호칭이 있습니다. 공민왕(恭愍王), 공양군(恭讓君). 고려 말 네 임금의 실록 제목은 아래와 같을 수 있었습니다.

▲ 공민왕 어진

<공민왕실록>, <신우일기>, <신창일기>, <공양군일기>.
네 임금의 실록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제목조차 확인할 길 없습니다.

우왕, 창왕 부자가 신우, 신창으로 불렸던 것은 고려 때의 일이었습니다. ‘신돈 → 신우 → 신창’으로 혈통을 이어나갔다고 단정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우왕이 태어나면서, 신돈의 아들이라는 풍문이 떠돌았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쫓겨나고 아들 창왕이 등극하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당시 신진사대부 그룹의 동태를 간략히 살피겠습니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그룹은 한 목소리로 요동정벌을 반대했습니다. 철령 이북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는 명나라에 외교적으로 대처하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요동정벌을 반대했으니 위화도회군을 환영했을 것은 당연한 일. 이색의 움직임이 기민했습니다. 이숭인, 권근 등과 더불어 군부의 조민수와 손을 잡고 우왕의 아홉 살 난 아들 창을 옹립하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정몽주, 정도전이 반격에 나섰습니다. 가짜 왕씨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入眞) 논리로 창왕의 정통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는, 결국 왕을 갈아치웠습니다.

조선 개국공신들의 고려 역사 정리에 남는 의문이 있습니다.
신우, 신창, 공양군을 욕보이면 될 일에 공민왕은 왜 끼워 넣었는지?

공민왕은 이성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왕이었습니다. 이성계는 그 보답으로 홍건적의 두 차례 침략을 격퇴하는 등 수많은 승전보를 공민왕의 은혜에 보답했습니다. 더불어 이성계는 고려 민초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공민왕 재위기는 조선 개국공신들에게도 의미가 각별했습니다. 공민왕의 반원자주화정책이 변화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면, 말년에 정무를 승려 신돈, 권신 이인임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던 것은 뼈아픈 좌절이었습니다. 가능성의 내용은 성리학을 국시로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좌절은 전체 사대부 그룹에서 역성혁명파를 분리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이래저래 공민왕도 조선 왕조 창업의 정당성 홍보에 필요한 임금이었습니다. 

<필자 소개> 정인택 1961년 경북 안동 生 소설가 <위험한 질주>로 등단 단편집 <뽕짝 병원 이야기> 장편 <남자의 가정>등 출간

정인택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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