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코드 세 가지

실록이 어떤 성격의 글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인터넷에 실록이 공개된 덕분입니다. 제 나름으로 ‘역사 마니아’를 자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한글 번역본이 인터넷에 뜨기 이전까지 실록은 ‘내게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번역에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인터넷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긴 것은 궁서체로 나타내겠습니다. 

첫째, 실록은 일기입니다.
일기의 오늘은 어제와 이어진 오늘일 수도, 전혀 다른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아래 두 기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개입한 이들의 처벌을 주청한 것으로 서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정조는 현직 국가원수에게 보장된 공권력을 개인적 복수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정조가 명군으로 후대의 평을 받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던 얘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일기를 쓰다 보면 날씨만 적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오늘은 어제와 별 상관없습니다. 

토우(土雨)를 순우리말로 옮기면 ‘흙비’입니다. 한자어로는 황사(黃砂), 짙은 황사를 나타낸 표현도 있습니다. 이것은 한문 원문과 함께 옮기겠습니다.

저에겐 한문을 해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글 번역본을 읽는 데에 익숙해지면, 한문 원문과 비교, 대조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비교, 대조 역시 한글 번역본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실록은 대하소설이 아닙니다. 앞뒤 인과관계 연결의 끈이 매우 느슨합니다. 일기의 어제와 오늘이 그렇습니다. 또 실록은 선대가 후대에 띄운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앞 편지와 뒤 편지의 인과관계도 느슨합니다. 조선조 5백년 내내 우리네 조상들은 일기, 편지 유의 글쓰기에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성찰과 소통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둘째, 실록은 두 시점(時點)의 과거사입니다.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 재위기 사관들이 듣고 본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 <광해군일기>을 펴내던 시기 현직 임금 인조와, 인조반정 공신들이 지난 정부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능창군이 신경희를 비롯한 서인 세력과 역모를 꾀했다는 석연치 않은 혐의에 연루돼 타살인지, 강요된 자살인지 여부가 불분명한 가운데 생을 마쳤던 것은 광해군 7년 11월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 이전 능창군 일가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문이 떠돌았습니다. 광해군의 북인 정부는 그 집터에 경덕궁(慶德宮)을 지었습니다. 이 역시 있었던 사실입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위 인용문에는 광해군 치세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인조 서인 정부의 시선이 들어있습니다. 무자비한 복수극으로 북인은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인조는 세 차례 한양을 비우고 도망쳤습니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마지막 병자호란의 아픔은 컸습니다. 삼전도 항복의식의 치욕에다가, 수십만 백성이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아무튼 모든 왕의 실록에는 두 시선이 혼재돼 있습니다. 왕의 사망으로 소멸된 정부와 실록을 펴내던 시기 현 정부의 시선이.

셋째, 실록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영국인 EH카는 역사를 일러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이는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사를 재해석, 재창조한다는 얘기입니다.

태조 7년 -1398년- 8월에 터진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실록>에 반란 수괴로 규정된 정도전이 고종 4년 -1867년- 11월에 재건된 경복궁으로 하여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잠규(箴規)는 잘못된 제도, 규정을 뜯어 고쳤다는 뜻입니다.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본을 비교하면, 奉化伯(봉화백)을 정도전(鄭道傳)으로 번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봉화백 작호는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내린 것이었습니다.

伯(백)은 세습 제후를 지칭하는 글자로, 주몽신화에서는 유화 부인의 아버지 하백(河伯)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백은 용왕(龍王)입니다. 천제(天帝)-하느님-로부터 물속 세계를 세습 영지로 떼 받은 하백은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할 때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도록 도왔습니다. 이때 천제와 하백은 이런 전언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천제 : 하백, 짐의 손자 주몽이 죽으면, …… 너도 죽는다.
하백 : 주몽은 제 외손자이기도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하느님.

주몽과 같은 백그라운드를 지닌 이와 싸워 이길 도리는 없습니다. 건국신화 주인공의 출생담이 기이한 것은 하늘과 혈통을 이으려는 후대의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겠습니다.
봉화백 정도전에게는 세습 영지가 따로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개국공신 중에 그 공로가 혁혁했던 배극렴, 조준, 이화 등 3인에게는 伯, 나머지는 君(군) 작호를 내렸습니다. 정도전의 경우는 봉화군으로 3년 지내다가 봉화백이 됐습니다. 즉 伯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예였습니다.

고려를 지키려 했던 인사들 중에도 伯으로 봉해진 이가 둘 있습니다.  
  

이색, 우현보는 생의 마지막 시기에 조선과 화해하여 국가원로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태조실록>, <정종실록>이 증언하는 바인데, 후대 사대부들은 두 사람을 고려 유신으로 그 충절을 기리려 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유교 율법으로 공동체를 통제하려는 ‘충신 발굴하기 운동’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서원 건립과 맥을 함께 했던 충신 발굴하기 운동의 중심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친필 현판을 내리기도 했고, 숙종은 사육신묘를, 영조는 두문동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후대의 시각으로 신화가 각색되듯이 역사 인물도 재창조됩니다. 
 
둔촌 이집은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의 지명 유래가 된 인물입니다. 강직한 성품에 효심도 깊었습니다. 이집은 위화도회군 1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집은 고려수절신으로 그 충절이 회자됐습니다. 위화도회군 이전에 고려수절신은 어불성설임에도 그러했습니다.

실록에 실려 있는 내용 중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것이 실록을 펴내던 시기의 정부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본 연재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인택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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