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완전히 역전된다! 부자는 지글지글 타는 불꽃 속에서 견디다 못해 혀를 축일 물이라도 달라고 애걸을 하지만 이것마저 단호히 거부당한다. “그때”는 부자의 세상이었고 거지 나사로는 버림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사로는 천국에서 위안을 받고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 “그때”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놓여 있었듯이, “지금”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다.
본문 중에 “믿음”이란 단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부자는 믿음이 적었고 거지 나사로는 믿음이 컸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행이 결정된 것이 아니다. 부자가 특별히 못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릴 근거도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자신의 다섯 형제만이라도 죽어서 고통 가운데 떨어지지 않도록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으로 보아, 부자는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을 갖고 있거나 신앙생활의 기초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부자는 죽어서 이리도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걸까? 이건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닐까? 단지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고 단지 살아 생전에 온갖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의 복을 누린다는 게 과연 온당한 처사인가? 왜 천사는 거지 나사로만 아브라함의 품에 인도한단 말인가? 살아 생전에는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높은 장벽이 가로막혀 있었다고 해도, 내세에서는 그 장벽을 말끔히 허물어 그 둘 모두 천국의 안식에 들게 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음할 수는 없을까?
왜 성서는 일방적으로 거지 나사로를 편들고 있을까? 설령 부자가 살아 생전에 몹쓸 짓을 많이 했다고 해도 뜨거운 지옥불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혀를 축일 물 한 방울이라도 달라는 그의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는 군말 없이 들어주는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는데, 이제 부자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부자와 나사로를 이렇듯 대조적인 고통과 안식으로 갈라놓는 신(神)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신에게는 눈곱만큼의 인정도 없단 말인가?
나로서는 신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러나 본문은 적어도 몇 가지 암시를 내게 준다. 자기 집 대문간에서 비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와 호화를 일삼는 부자의 종말은 참으로 끔찍하리라는 것, 천국과 지옥행을 가르는 것은 믿음이나 신앙생활이 아니라 살아생전의 고통이나 안락함일 수도 있으리라는 것, 부자의 다섯 형제 역시 일상의 즐거움과 사치에 눈이 멀어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참상들에 무관심하다가 끝내는 지옥불의 고통을 당하며 뒤늦게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게 되리라는 것, 본문은 부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지만 지금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요 기쁜 소식일 수도 있으리라는 것....
“지금” 나는 누구인가? 부자인가, 거지 나사로인가? 나사로처럼 비참한 지경에 있지도, 부자처럼 극에 달한 사치생활을 하지도 않기에 본문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나는 죽어 어디로 갈까? 지옥일까 천국일까? 혹시 바로 이 순간 내 주변에 “나사로들”이 있지는 않는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덩어리는 착실히 챙기고 부스러기는 대충 흘리는 식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가? 또 나의 형제들, 가족들의 장래 운명은 어찌 될까? 그들의 회개를 위해 나는 지금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모세와 예언자들”은 오늘 내게 뭐라 말을 걸어오고 있는가?
끝으로,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을 완전히 역전시킨 본문을 통해 오늘 내 삶을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돌이킬 역전의 실마리라도 잡을 마음이 드는가?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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