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4월29일, 한국언론재단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4,776명을 공개했다. 이날 자칭 보수단체들이 '박정희, 안익태를 빼라'며 회견장 밖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 이철우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지난 2005년 8월 29일에 이어 두 번째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번 명단은 2005년 명단을 포함하여 모두 4776명이다. 물론 8월 말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될 때에는 약간의 인물이 더 추가될 전망이다.
 
역시 이번 명단 발표는 예상대로 극심한 반대에 부닥쳤다. 심지어 여당 대표와 대통령까지 언급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반대 측의 논리는 역시 단순하고 천박했다. 두 차례에 걸린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에 등장한 그들의 반대 논리는 역시 ‘색깔론’이었다.

심지어 경희대 허동현 교수는 그가 사학자임을 의심하게 할 정도의 수준 이하의 말들을 늘어놓아 시청자들의 빈축을 샀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인들이 지켜야 할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근대적 의미의 ‘시민’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므로 친일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거나, 가변적인 개념인 ‘민족’ 담론을 부여잡고 친일청산을 논하지 말라는 둥. 아마 스스로도 친일인명사전을 폄훼하는 논리를 찾아내느라 몹시 곤혹스러웠던 모양이다. 앞으로 그가 역사학계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지 걱정이다.

그가 그렇게 혐오하는 ‘민족’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권과 자유, 평등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황제 파쇼시대는 나치시대에 버금가는 암흑의 시대였고, 그 당시 권력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학술적인 평가는 언제고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쓴이의 주관이 개입되는 ‘평전’이 아닌 존재하는 사실대로만 기록하는 ‘사전’의 형식으로조차 친일의 역사를 기억하지 말라고 하면 허 교수는 대체 학교에서 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일까.

사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요란한 목청 때문에 가려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반성한 사람들이다. 이번 달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차분히 음미해 보면서 진정 친일의 역사를 정리하는 모습은 어떠해야 하며 그 희망에 우리 사회는 얼마만큼 다가서 있는지 살펴보자.

8ㆍ15 꼭 한 달 후인 9월 15일 조선임시교육자협회(이듬해 2월 17일 조선교육자협회로 발전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좌익단체로 규정되어 와해 당함)는 <중등교육자대회>를 열고 총사직을 결의한다. 당시 성명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민족해방으로부터 인민본위의 신흥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성을 가진 것은 교육이므로 교육자 책임은 중대함을 느끼는 바이다. … 그러나 8月 15日 이전의 우리 교육계를 반성하여 볼 때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탄압과 착취아래 부득이 주구적인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가장 양심적이며 산 실천과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교육자들로서 마땅히 교육자적 책임을 져야하겠다. 하야 총의를 결의코 조선중등학교교육자의 총사직을 이행하여서 사랑하는 조선학도들과 사회에 사죄하기로 하였다. 단 학교장 이외의 교직원은 생도의 현상을 감하여 정부가 수립되어 문교당국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각기 지역에 종사하겠으니 인민제위의 감시와 편달이 있기를 바란다.” (매일신보 1945.9.15)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기 한 달 전 엄상섭을 비롯해 일제하 검사를 지낸 여덟 명은 자진해서 사표를 제출하였다.

“오늘날 독립정부가 수립되고 검사 진영의 우수한 인재가 배출된 이 마당에 있어서 민족정기가 고창되고 있는 현하 정세에 비추어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할 뿐더러 인심 쇄신과 민족정기 앙양에 협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통감하여 이에 우리 일동은 사의를 표명하는 바이다.” (민주일보 1948.8.24)

“이 검사생활, 이것이야말로 왜정 압력 하에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시던 애국지사들에게 대하여는 지금도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공사의 생활에서 마음에 꺼림칙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왜제하(일제하-글쓴이 주)의 검사, 즉 고관을 지냈다는 것만은 한없이 후회되는 일입니다. 그 동안 사상사건을 취급시키지 아니하던 왜제하의 검찰정책 때문에 큰 죄를 지을 기회는 없었으나, 굴절했고 왜제통치에 협력을 하였다는 것만은 아무리 사과를 하여도 모자랄 것입니다.” [허일태ㆍ신동운ㆍ엄상섭, 『권력과 자유』(1957년 4월 출간 엄상섭의 동명저서 재편집), 동아대학교 출판부, 2007, p471]

엄상섭은 2ㆍ4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6·25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표적인 부정부패 사건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조사해 폭로하였고 국가보안법 개악 저지 투쟁에 앞장서는 등 1960년 사망하기까지 청렴하고 강직한 삶을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일제 당시 광주와 함흥에서 검사직을 수행했기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다.
 
다음은 홍익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이항녕의 경우로 그는 일제하 경남 하동과 창녕군수를 지냈기에 명단에 포함되었다.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 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2004.4.18 『오마이뉴스』,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

이항녕은 1945년 10월까지 창녕군수로 재직한 후, 미군정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한 달 뒤 이마저 사표를 제출했다.
 
끝으로 화순 군수, 황해도 산업과장과 해방 직전 충남 광공부장을 지내 명단에 실리게 된 현석호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1945년 9월 중순경, 충남 도지사로 부임한 미군정 육군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 이유를 묻는 미군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나는 일제에 협력한, 고급관리로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회고록 <한 삶의 고백>에서)

현석호는 한국전력의 전신격인 남선전기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자유당 소속으로 민의원이 되기도 했지만, 1954년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획책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해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 후 5ㆍ16쿠데타 직전까지 장면 내각에서 국방과 내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나이를 적어도 만 20세로 본다면, 1925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은 현재 초고령이거나 하루하루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그들에게 위의 사례와 같은 모습을 기대하기도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결국 그들이 회피한 책임의 결과는 오늘날 ‘친일논란’과 ‘국론분열’이라는 수식어로 우리의 업보가 되고 만 것이다. 일제가 지배한 기간의 거의 두 배의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는 친일의 업보에서 언제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학진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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