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정보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우리의 삶은 통째로 이 도로 위를 질주하게 되리라는 예단마저 없지 않습니다. 고속도로 위로 달려오는 엄청난 양의 정보는 '불확실성'을 줄여주고 우리의 세계를 무한히 확대해주리라고 기대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보고속도로는 모든 '거리'를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감각, 취미, 사상까지도 바꾸어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거리'의 제거가 '인간관계'마저 제거함으로써 도리어 소통(疏通)이 경색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로를 달려 마침내 도착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더욱 걱정하였습니다. 오늘의 첨단과학은 인간이 어디로 향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없는 한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에 불과하다는 당신의 극언에 동감합니다. …

가상현실을 주관 속에 창조하고 그것을 상대하는 간접경험의 세계는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의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게 하고 현실을 방기하게 함으로써 엄청난 지배구조의 말단에 단 하나의 칩(chip)으로 매달리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른바 소외(疏外)의 어떤 극치입니다. …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얻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하는 한 그루 나무인지도 모릅니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鑒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鑒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어깨동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pp.125~126·128)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화의 긍정적 측면과 아울러 부정적 측면을 언급하는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기독청년운동과 관련하여 몹시 중요한 몇 가지 용어나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관계",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가상현실을 주관 속에 창조하고 그것을 상대하는 간접경험의 세계",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 "사람들과의 어깨동무" 등이 그렇습니다.

운동, 특별히 기독청년운동은 "인간관계"의 운동, "사람들" 곧 교회의 청년대중들과의 "어깨동무"의 운동입니다. 우리의 기독청년운동은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 대중과의 진실한 인간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서 서로의 신앙과 삶이 변화되어가고 이로써 인간미를 잃고 날로 각박해지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인간다움의 모범을 보이는 것, 이로써 '인간이 이렇게 아름답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잔잔한 감동과 믿음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혹은 제도적 문제들은 우리의 관심사 밖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질 때만이 사회와 교회의 갱신도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는 전혀 변화되지 않으면서 개혁의 구호만 드높이는 자세로는 우리 운동은 교회 대중들과 사회로부터 아무런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데도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외부에 대한 비판에만 열을 올렸지 우리 내부의 자기비판에는 성실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마태7,3~5). 청년 예수의 말씀입니다. 그는 하느님나라 운동의 벗들에게 이렇듯 철저한 자기성찰을 요구했고, 이것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성찰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제각기 골방에 처박혀 해야하는 것일까요? 물론 더러는 자기 "홀로"만의 내적 성찰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조용히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일도 반드시 요구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자기성찰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부족한 면이 많지만, 이 부족한 우리의 모습을 갖고 교회 대중들과 "어깨동무"하고 하나 둘 운동의 과제들을 풀어나가면서 서로를 거울 삼아 자기성찰을 꾸준히 하는 겁니다.

옳습니다. 운동은 직접경험의 세계,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운동은 모름지기 사람 중심, "인간관계" 중심, 현장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론 중심, 토론 중심이 아닙니다. 틈나는 대로 교회 대중들과 접촉해야 합니다. 세 명이든 네 명이든 수(數)에 구애받지 말고 공동체를 꾸린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아니, 단 둘이 만났다고 해도 진실한 대화가 있고 기도가 있으면 바로 거기에 우리 운동의 중요한 근거지 하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규모의 신앙공동체가 전국 각지에서 하나 둘 솟아오를 때 우리의 운동은 힘을 갖게 되는 것이지, 이런 바닥공동체 건설을 게을리 한 채 뭔가 큰 일을 치겠다는 것은 적어도 "인간관계"에 중심을 두고 있는 기독청년운동을 하는 자세는 결코 못 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우리의 운동은 교회 대중과 얼굴을 맞대고 볼을 비비는 직접경험의 운동이지 "가상현실을 주관 속에 창조하고 그것을 상대하는 간접경험의 세계"가 아닙니다. 교회 대중과 수시로 만나는 일이 없이 '교회 대중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할거야' 하는 식의 간접경험에 중심을 둔 운동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의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게 하고 현실을 방기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많이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라도 교회 대중과 더욱 열심히 접촉해야 합니다. 이 접촉에서 운동에 대한 열정과 신념이 새롭고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도 대중과의 접촉을 게을리 하면 서서히 자신감과 운동의 감각을 잃고 운동에서 멀어져갈 게 뻔합니다.

청년 예수 역시 그랬으리라 여겨집니다. 예수도 우리처럼 이따금 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제자훈련을 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실망도 많이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예수는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철야기도로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운동에 대한 회의가 가끔씩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들었지만 그래도 대중(민중)과 끊임없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을 두루두루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을 대하면서 운동의 열정이 새롭게 불붙었습니다.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바로 이 "사랑과 봉사"로부터 운동에 필요한 "진정한 지식과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동이 청년 예수의 운동에서 배워야 할 소중한 교훈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구절을 놓고 묵상해 봅시다.

운동이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인 한 "인간의 정체성" 곧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인간학 내지 인간론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이 운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청년 예수는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 5:48). 이것은 예수운동이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깊은 믿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의 이런 인간이해는 인간의 죄성(罪性),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강조하기 일쑤인 기독교의 전통적인 인간이해와 상충됩니다. 이 둘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현실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티끌만큼 작은 죄 하나라도 짓지 않는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완전"이라는 의미를 내적 동기의 순수성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늘 자신의 내면을 어질고 순수하게 지켜가려는 자세, 바로 이런 성실한 자기성찰의 자세를 견지하라는 게 예수의 말씀의 참뜻일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마 5:3-10) 이야기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바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 기독청년 운동가들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인간적 품성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굴뚝같으면서, 정의에 목마르지 않으면서, 자비심이 없으면서, 평화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운동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가 제풀에 지치고 맙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운동"도 잘 풀어갈 수 있다는 것, 그 누구의 인간성도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운동은 증오나 미움에 기초한 파괴적인 운동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에 기초한 건설적인 운동이 된다는 것이 예수의 인간이해의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인간성을 신뢰해야 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누가11,4).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이 기도는 참으로 소중합니다. 서로 비판할 것은 냉정하게 비판해야 하겠지만, 이 비판은 철저히 서로간의 사랑과 신뢰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판을 받아도 마음이 상하지 않고 제 잘못을 뉘우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상호간의 사랑과 용서와 신뢰가 없는 운동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뭡니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운동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써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몸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기독청년운동이 적지 않게 불신의 벽에 부딪치고 있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우리 운동가들 내부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청년 예수의 인간이해의 또 다른 측면은 인간의 당당한 "주체성"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한10,38).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요한6,38).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5,17).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요한복음에서 대충 추려본 이상의 몇몇 구절만 놓고 보더라도, 청년 예수의 인간이해는 인간의 주체성과 능력을 과소 평가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비관주의적 인간이해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겠다는 데서 우리는 예수의 겸허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 겸허함이 당당한 주체성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란 말씀에서 우리는 청년 예수가 제자들을 운동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 떨쳐 일어서게 하기 위해 고민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도 청년 예수처럼 겸손하면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운동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매순간 겸손히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운동이 곧 하느님의 운동이요 예수의 운동이라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앞에 나서서 운동을 풀어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교회 대중들이 우리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리라는 믿음과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오늘 교회 대중들과 "어깨동무"하고 있습니까? 진실한 "인간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고 있습니까?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에 성실합니까? 혹시 "간접경험의 세계"에 빠져든 채 "현실의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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