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이 일러준 대로 돌아오는 길에 거창에 들러 거창고등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시가지 변두리에 보잘 것 없는 교사가 울타리도 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대안교육을 모색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를 보내는 곳입니다. 휴일이라 인적도 없는 교정을 돌아보다가 강당의 벽면에서 다음과 같은 직업선택의 십계(十戒)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한 시대의 빼어남을 지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장중한 역사의 산맥 속에서 익어가는 숯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기계의 부품이 되지 말고 싱싱한 한 그루 나무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111쪽.)

인생은 하나의 길입니다. 어떤 목표, 어떤 자세로 그 길을 걸어가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가운데서도 틈틈이 그 길의 과거, 현재, 미래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고 전망하는 것은 인생의 길(道)을 바로 걷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맹목적으로 열심히 살기보다는 그 열심이 과연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를 진지하게 사색해야 합니다.

인생의 길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은 영웅의 길로 치닫습니다. "한 시대의 빼어남을 지향하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불세출의 영웅이니 난세(亂世)의 영웅이니 하는 온갖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부와 권력을 자랑하며 사회의 정점에서 역사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영웅들 가운데도 역사와 민족을 참으로 걱정하는 일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그들은 역사의 모순에 내재된 시대의 아픔을 모른 채 온갖 부귀영화와 거기에 뒤따르는 갖은 찬사에 파묻혀 생을 마감합니다. 3김(金) 시대로 상징되는 정치 현실에서 우리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몇몇 영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서글픈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길, 성공의 길을 힘차게 달려갑니다. 우리 나라에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은 사법고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일년에 수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거에 출세와 성공을 보장받으려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는 걸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근래에는 사법고시 열풍이 더욱 뜨겁게 몰아쳐 반듯한 직장마저 내던지고 뒤늦게 고시생의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데 결코 우습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닙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소시민의 길을 지향합니다. 그들은 이른바 중산층 의식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회의 특권계층에는 들어서지 못하더라도 악착같이 일하고 돈을 벌어서 남들처럼 반듯하게 살아보겠다는 것이 소시민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좋은 직장, 능력 있는 배우자, 토끼 같고 여우 같은 자식들, 내 집 한 칸, 자가용, 쾌적한 여가생활, 안락한 노후 등이 그들의 인생의 중요한 희망사항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열 중 아홉은 아마도 이 소시민적 삶, 소시민적 행복을 바란다고 여겨집니다. 부모들이 허리가 부러져라 일해서라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애쓰는 것은 대학 졸업장이야말로 학벌 위주의 우리 사회 풍토에서 소시민적 삶을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나 다양한 계급이나 계층이 존재하고 빈부의 격차가 있는 법인데, 소위 평범한 행복을 바라는 중산층이 다수를 점하는 사회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살기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소수 특권층이 사회의 전체 부의 대단히 많은 몫을 독차지함으로써 중산층이 허약하고 다수의 하류계층이 존재하는 사회는 불평등과 불의가 지배적인 사회입니다. 냉정히 따져볼 때 아직까지 우리 나라는 중산층이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했으며, 특히 IMF 상황을 맞아 그나마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중산층이 일시에 하류계층으로 내몰리는 사태를 당분간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민중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 아무리 농촌 인구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아직도 4백만 농민이 있고, 무려 1천만에 이르는 노동자가 있고, 적지 않은 수의 어민들이 있고, 또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운 숱한 도시빈민들이 있는데, 어쩌면 소시민 계층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민중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소시민적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인데, 그렇지만 민중에서 소시민으로 경제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1987년의 6월항쟁에 뒤이어 봇물처럼 터져 나온 노동운동의 결과 노동자들의 임금이 수출 경쟁력에 부담을 줄 정도로 상당한 수준까지 인상되었다고 말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의 다수 노동자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힘겹게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IMF 이후 생계나 실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는데, 이것은 이 땅의 민중들, 더 넓게는 소시민들의 경제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정부 통계로도 이제 실업자가 200만은 넘어서리라고 예상하는데, 그렇다면 줄잡아 천만 이상이 생계의 위협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복음서의 청년 예수를 살펴봅시다.

예수는 전형적인 민중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이 마리아의 입을 빌어 "(주님은)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누가1,53)라고 노래하고 있는 "마리아 찬가"(누가1,46~55),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주님께 봉헌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누가2,24)를 드렸다는 보도,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주기도문 중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에 바로 뒤이은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누가11,3)라는 구절, 가장 민중적인 복음서라 평가받는 마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마가6,30~52)에 뒤이어 비슷한 내용의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가8,1~10)을 거듭 보도하는 것, 예수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그 살벌한 안식일 금지조항을 어기고 밀이삭을 잘라먹은 것(마가3,23) 등은 우리에게 예수와 예수 주변 사람들의 민중성, 엄청난 빈부격차에 대한 비판의식, 절대빈곤을 암시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누가9,58)는 예수의 말씀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6,25·33~34)는 말씀은 결코 낭만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절대빈곤의 청중들을 향한 눈물겨운 위로의 말씀입니다. 소수의 안락을 위해 다수의 빈곤을 조장하는 불의한 사회를 뒤엎는 운동에로 떨쳐 일어서자는 단호한 촉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청년 예수, 민중의 아들 예수는 소시민적 행복을 위한 출세의 길, 성공의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지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소시민적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영웅의 길, 영광의 길을 택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말미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요한6,15)는 해설을 달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에게는 세상 권력에 대한 야망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대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오늘 이 땅의 정치가들과 권력을 뒤로하고 홀연히 산너머로 사라지는 예수의 초연한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청년 예수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 "장중한 역사의 산맥 속에서 익어가는 숯"의 길, 십자가의 길, 인간사랑 민중사랑 생명사랑의 길, 신앙의 길, 양심의 길, 민중과 함께 하는 하느님나라 운동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는 길, 불의한 세상에 불을 지르고 거짓 평화에 분열을 일으키는 길(누가12,49~53),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는 길(마가2,17), 섬김과 봉사의 길(마가10,42-45), 철저히 낮아지고 천해지는 길, 순교의 길(요한12,24~25), 양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의 길(요한10,15·18),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1,29)의 길, 세상의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옥에 갇힌 이들과 하나가 되는(마태25,31~46) 길, 역사의 밑바닥의 길, "좁은 문"(마태7,13~14)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젊은 혈기에서 나온 우발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신중하게 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장남인 자신의 출가로 인해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를 고뇌한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청년 예수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세례를 받았다는 것, 또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광야의 유혹"(마가1,12~13)을 당했다는 것은 그의 출가(出家)와 운동의 길로 들어섬이 오랜 내적 고민 끝에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하는 대로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2,18). 청년 예수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그대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부귀영화입니까? 안락한 소시민적 행복입니까? 27평이나 33평 아파트입니까? 신형 자동차입니까? 새록새록 쌓여 가는 저금통장 액수입니까? 실직을 당해 서울역이나 지하철 역내에서 신문지를 이불 삼아 노숙하는 이들의 슬픔과 절망의 눈빛입니까? 물건 판 돈 한푼 한푼을 보석처럼 세고 있는 거리의 행상인들의 삶에 지친 모습입니까? 가정파탄 때문에 부모 품을 떠나 낯선 곳에서 밤낮으로 그리움의 눈물꽃을 피우고 있는 다섯 살이나 일곱 살 먹은 아이들의 슬픈 눈동자입니까 ? 수천 수만에 이르는 이 땅의 결식 학생들의 핼쑥한 얼굴입니까?

오늘 그대의 가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쟁심, 이기심, 소시민 의식, 명예욕, 출세욕, 영웅심입니까? 청년 예수나 전태일이나 윤동주나 문익환이 간직했던 그 푸른 동심(童心), 신심(神心), 선심(善心), 인간적 진실에의 불타는 열심(熱心)입니까? 혹은 이 둘의 주체할 수 없는 출렁거림입니까?

"기계의 부품"으로 살 것인가, 광활한 역사의 벌판에 버티고 서는 "싱싱한 한 그루 나무"로 살 것인가! 틈틈이 이 문제를 놓고 근본적인 고민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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