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 1/9이 사망했다는 1948년 제주 4.3을 시작으로, 그 여파로 발생한 여수ㆍ순천 사건, 그리고 1960년 4.19 혁명과 유신독재에 반대한 민주인사들을 고문ㆍ조작해 사형시켜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비난을 받는 1975년 4월 9일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 등.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4월은 피로 얼룩져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4.19를 제외하고는 4.3이나 인혁당 사건 등은 법적으로는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하고 있는 초보적인 단계지만 아직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복권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이 무려 60년 만인 올해 처음 만들어졌고, 인혁당 관련 민주인사들의 기념사업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건의 최고 책임자인 박정희는 여전히 살아 있는 정치실체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이 같은 사건들의 명예회복은 더욱 늦어지거나 어려워질 전망이다.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권력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구 정당이 10년 만에 되찾아 온 권력을 향유하느라 각 분야에서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임 초 입길에 올랐던 유인촌 문화부장관의 태도가 가장 상징적이다. 마치 6.25 와중에 인민군과 빨치산에서 국방군과 토벌대로 여러 번 점령군이 바뀌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이 땅 민중의 몫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잃어버린 10년’을 만끽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면 클수록 국민의 고통은 정비례할 것이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더욱이 걱정인 것은 ‘도둑맞은 10년’(대표적인 극우인사 이철승의 표현)을 만회하고자 하는 욕심이 그저 눈에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민들 특히 청년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주입하려는 움직임이 확연히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권력은 언제나 그들의 차지였으나, 문제는 역사와 이념분야 그리고 젊은 층에게 있어서만큼은 진보세력에게 항상 정통성과 선명성을 선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올해 큰일을 벌이려 절치부심 만든 단체가 바로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다.

이 단체의 공동위원장 중 한명인 이인호 전 러시아대사가 가장 먼저 시작할 사업으로 대학생 교양강의 개설을 꼽은 것도 그 같은 맥락이다.

“자기 나라의 건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는 대학생이 많다. 많은 학교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건국이나 이승만, 한국전쟁 등을 주제로 실질적으로 학점을 인정받는 교양강의를 개설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이런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축제를 벌였으면 좋겠다. 프랑스는 혁명 기념일날 전국이 축제장이 되는데 건국과 관련된 국경일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2007.11.20. 연합뉴스 인터뷰 내용 중)

이들이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세 곳이다. ‘건국’ ‘이승만’ ‘한국전쟁’. 그동안 젊은이들로부터 ‘수구ㆍ반공ㆍ반통일 세력’이라는 비난을 받아 왔던 이들은 마침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맞은 ‘건국 60주년’을 발판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대립항은 ‘건국↔광복’, ‘이승만↔김구’, ‘한국전쟁↔평화통일’이다.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은 2007년 9월 27일 지금의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 부르자며 법률개정안을 낸데 이어 이인호 전 대사는 고액권 화폐에 김구 선생을 넣는 것에 반대한 것이 바로 그 좋은 사례다.

“광복절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8월 15일로 같은 바, 지금까지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일인 1945년 8월 15일이 중시되고 실질적인 건국일인 1948년 8월 15일의 의미는 축소 되어왔음. 또한, 1945년 광복은 자력에 의한 광복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으로 근대국가 건설에 분단국가라는 비극성을 낳았으며, 자칫 국제화시대에 반감적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하여 국가정신 및 정책지향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 따라서, 선진 산업화와 민주화의 근원이 된 건국정신을 되살리고 헌법정신에 맞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연스럽게 국민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미래지향적이며 밝은 대한민국을 추구함과 동시에 국민의식통합과 국가발전의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치하려는 것임.”(정갑윤 의원 법률 개정안 내용 중)

“말 나온 김에 김구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분은 아마 대한민국 화폐에 얼굴이 실리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을 거다.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끝나야할 분이다. 살아생전 대한민국 체제에 대해 반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한민국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이인호 2007.11.20. 연합뉴스 인터뷰 내용 중)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면 국제화시대에 반감적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하여 국가정신 및 정책지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과 남북 분단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암살된 김구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끝나야할 분”이며 “살아생전 대한민국 체제에 대해 반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한민국과 결부시킬 수 있는갚라는 주장은 2002년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써 국민적 공분을 산 김완섭의 주장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또 다른 공동위원장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 역시 최근 문제가 된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를 발행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로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정갑윤 의원의 법률개정안은 대선 17대 국회에서는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높지만 18대 국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한나라당-자유선진당-친박연대 등에 의해 다시 추진될 가능성이 높고 이들은 대다수 역사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를 공격적으로 보급할 것이 확실하다.

더욱이 이 같은 일련의 퇴행적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 사법부마저 비관적인 판결이 나와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울고법 형사8부(최성준 부장판사)는 3월 28일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 “유관순은 여자 깡패”요 “김구는 조선왕조의 충견”이라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로 기소된 김완섭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과 같은 벌금 750만원의 낮은 형량을 내린 것이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유관순에 대해서 명예를 훼손한 것 등 죄질이 좋지 않다. 그러나 피고인의 주장이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이 볼 때에도 논리에 맞지 않고 근거 또한 없으므로, 일반 국민들에 대한 영향이 많지 않으며, 학문과 창작의 자유에 대한 제한 측면에서 볼 때, 원심의 벌금형은 적정하다”고 한다.

위에 열거된 사람들에 주장에 따른다면, 앞으로 독립운동 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것은 국제화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며, 1958년 이미 살아생전 화폐의 주인공이었던 이승만은 또 다시 10만 원 권 화폐에 등장해야 하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욕을 대놓고 해도 감옥 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시대가 곧 도래 할 것이며 젊은이들은 해방 정국에서 발생한 수많은 학살과 희생을 추모하기는커녕 건국을 마냥 축하하며 거리에서 축제라고 벌여야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친일파는 시대의 선각자’로 추앙받을 날이 실현될 날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했다고 명시된 우리 헌법 전문은 앞으로 “대한민국은 단독정부수립 투쟁에서 승리한 국부 이승만과 한민당의 법통과 5.16 산업화이념을 계승”했다고 바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역사가 정상을 향해 힘겹게 오르다 산 중턱에서 땅바닥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지고 있는 느낌이다. 

방학진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