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창작하고 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승낙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믿습니다. 다른 어떠한 실증적 사실(史實)보다도 당시의 정서를 더 정확히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미천한 출신의 바보 온달을 선택하고 드디어 용맹한 장수로 일어서게 한 평강공주의 결단과 주체적 삶에는 민중들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강공주와 함께 온달산성을 걷는 동안 내내 '능력 있고 편하게 해줄 사람'을 찾는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신데렐라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이 안타까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마디로 숨겨진 칼처럼 매우 비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품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떤 실상을 갖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81-82쪽.)

역사적 상상력의 날개를 조금만 펼쳐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창작"한 당시 "민중들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는" 이야기이듯,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 역시 예수라는 한 신적(神的) 인간의 신출귀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와 민중들이 함께 펼치는 빼어나게 민중적이요 집단적이요 눈물겨운 운동 이야기라는 걸 말입니다.

모순이 팽배한 곳에는 민중의 억눌림과 한숨이 있고, 이 맺히고 쌓인 민중의 한(恨)과 분노는 어느 땐가 일정한 계기를 맞으면 활화산으로 폭발한다는 역사의 상식은 올바른 복음서 읽기의 필수조건입니다.

복음서를 '이렇게 읽어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민중의 눈으로 복음서를 예수와 민중이 함께 펼치는 하느님나라운동 이야기로 읽는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와 민중의 만남, 그 만남을 통한 예수와 민중의 내면적 변화, 이 내면의 변화로 말미암은 외부 변화 등은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대목들입니다.

무턱대고 쭉쭉 읽기보다는 단 한 구절을 읽더라도 그 구절에 담겨 있을 예수 시대 혹은 초대교회 민중들의 한과 절망, 분노와 슬픔, 희망과 신념 따위를 역사적 상상력에 기대어 깊이 묵상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때 거기"의 예수운동 이야기와 "오늘 여기"의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교통해야 합니다. 복음서와 우리 사이에 거의 2천 년의 시간의 틈이 있지만, 사회적 모순의 본질과 그 모순으로 말미암은 민중적 고통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그때 거기"의 예수운동 이야기에 비추어 "오늘 여기"의 삶을 읽고 또 "오늘 여기"의 삶에 비추어 "그때 거기"의 예수운동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 가운데 복음서와 오늘의 역사인식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트일 것입니다. 역사가인 E. H. 카아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서를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평강공주가 "미천한 출신의 바보 온달을 선택하고 드디어 용맹한 장수로 일어서게" 하였듯이, 청년 예수는 어쩌면 오랜 세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갈릴리의 어중이떠중이 민중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나라 운동을 삶의 길로 택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요 "주체적 삶"의 태도입니다.

마가복음은 청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1:11)고 보도하는데, 이것은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청년 예수의 의연한 모습이 마가공동체의 신자들에게 크나큰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이야기에 바로 뒤이어 보도되는 "광야에서 유혹 받으시는 예수"(마가1,12~13) 이야기는 청년 예수의 그 결단이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나약한 인간, 십자가로 통하는 고된 운동의 길보다는 주어진 한 생(生) 그럭저럭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운동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하면서도 순간순간 마음이 약해지듯이 예수 역시 삶의 굽이굽이에서 운동을 슬그머니 접어두고 좀 편안하게 살고 싶은 소시민적 욕망을 더러는 느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청년 예수는 운동의 길에서 끝내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역사 앞에서의 진지한 자기성찰과 무엇보다도 역사의 모순을 짊어진 채 신음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순결한 사랑으로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을 하였습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요한15,13) 삶,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하나"(요한12,24)의 순교적 삶,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요한10,18) 주체적 십자가의 삶, 역사의 주변부인 "성문 밖"(히브리13,12)에서 고난과 치욕을 당하는 삶, 거짓 평화의 세상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는 삶(누가12,49·51), 교활한 독재자 헤롯을 "그 여우"(누가13,32)라고 부르며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다 하고야 말겠다는 의연한 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 삶은 처절한 십자가 처형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과연 청년 예수는 "어리석은 사람",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현명한 사람",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그는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을, 세상 명예와 지위보다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됨"을, 세상의 빈틈없는 경제논리보다는 어수룩한 사랑의 계산법을(누가15,1~7),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권력의 힘보다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민중적 저력을, 거짓과 속임수로 자기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때묻지 않은 양심과 신앙으로 진리에 봉사하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이런 청년 예수를 세상 권력자들은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침 뱉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의 친척들"마저도 예수가 정말 정신이 나가지나 않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마가3,21).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는 과연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식의 어수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정의에, 만인의 자유와 평등과 친교의 새 세상에 대한 꿈에, 진리에, 인간적 진실에, 세상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경쟁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 품성"에,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신념에, 성령에 미쳤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바보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청년 예수만 미친 게 아닙니다. 예수가 부르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던"(마태4,22) 갈릴리의 네 어부, 세금 징수원이라는 먹고살기에 별로 부족함이 없었을 직장을 내팽개치고 예수를 따랐던 마태(마태9,9),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던"(누가8,3) 여자들도 세상의 보편적 기준에 비추어 볼 때는 결코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 소중한 생업과 직장과 재산을 무명의 예수의 꿈과 맞바꾸다니….

그러나 역사는 달리 평가합니다. 역사는 말합니다. 청년 예수는 그토록 미쳤기에 이제 오고 가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인간적 진실을 말해 주는 진리로 부활하였다! 청년 예수의 그 "우직한 어리석음"이야말로 이 세상과 인간을 모든 거짓 이념과 가치와 구조에서 구원하는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이다! 청년 예수가 걸었던, 아니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와 함께 걸었던 그 "하느님의 바보들"의 길이야말로 참된 인간 됨의 길이다!

오늘 그대는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 무엇에 미쳐 있습니까? 그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민중과 함께 걷는 인생을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비웃음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대가 꿈꾸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경쟁적 능력"입니까, 아니면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인간적 품성"입니까?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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