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가족제도는 고정된 게 아니라 사회발전이라는 보다 큰 틀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대가족제도가 산업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히 핵가족화 되는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렇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 사회나 국가가 얼마나 정의와 자유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 있느냐에 따라 가족생활의 양태가 크게 좌우된다. 사회나 국가가 안정된 기반 위에 서 있을 때는 가족생활 또한 안정과 평화를 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한 사회가 불안하거나 국가가 힘이 없어 외부의 침략을 당할 때는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란 휘몰아치는 광풍 앞의 촛불과도 같다.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약소국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는 국가가 안정을 이루지 못할 때 가정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를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특히 예수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갈릴리 지방이 당시 로마의 식민지배에 목숨 걸고 항거하는 독립투사들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는 어린 시절부터 가정의 평범한 행복은 국가의 안정과 독립이 없이는 한갓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마가 3:31-35는 예수가 “군중들”에게 한 말씀이다. 복음서에서 예수 주변에 몰려드는 군중들은 누구인가? 사회에서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이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당하고 안으로 한(恨)을 쌓으며 사는 사람들이다. 로마와 유대 권력자들의 이중적 착취 아래 거덜난 농민들이요 일용노동자들이요 실업자들이요 병자들이다. 지배자들의 착취와 횡포 아래 여지없이 박살난 가정의 소박한 행복을 하루바삐 되찾고 싶은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행복!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특별히 가난과 질병과 소외에 시달리는 이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원했던 예수는 이런 군중들의 소박하고 눈물겨운 소망을 이심전심으로 느꼈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도 소박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인정(人情) 넘치고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운동이다.

당시 “예수가 미쳤다”,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 따위의 악소문이 여기저기 떠돌았다(마가 3:21-22 참조). 장남 역할을 충실히 하다가 어느 하루 출가한 예수 소식에 가슴 졸이던 가족들은 이런 소문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예수를 찾아 나선 모양이다.

그런데 마음 졸이며 찾아온 가족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출가한 후 이래저래 딸린 식구가 많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한시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을 테지만, 군중들을 향해 던지는 예수의 말씀은 단호하기만 하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조건으로만 가족의 참된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핏줄의 인연보다 더욱 본질적이며 중요하다는 것이다. 핏줄의 질긴 인연에 기초한 가족이기주의는 하나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 비수 같은 말씀의 참뜻은 하나님나라운동을 위해 가족의 소박한 행복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게 아니리라. 오히려 그 행복이 진실로 가능하려면 먼저 사회구조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데에, 즉 사회 전체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평범한 행복이 깨진 오늘의 현실에서는 하나님나라운동에 헌신하는 것이 그 행복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는 데에 말씀의 참뜻이 있는 게 아닐까.

예수의 가족들은 결국 예수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나에게는 가족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 가족을 좀더 큰 틀에서 바라보고 사랑할 믿음과 용기가 있는가? 

정연복  pkom5452@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