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전통의 계승·발전이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는 “그때 거기”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우리가 과거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잇는다고 할 때 그 “자랑스럽다”는 것의 기준이 과연 뭐냐 하는 것이다. 원칙상으로는 인간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것은 좋은 전통이요, 인간의 생명을 억누르는 전통은 나쁜 전통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을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살이의 선과 악이 두부를 칼로 자르듯 그렇게 선명히 구별되는 게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한 전통을 놓고도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몇 사람”(마가 7:1)과 유대교의 “정결법” 규정을 놓고 한판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하신 말씀이다. 아마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시비를 걸기 위해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논쟁에 능한 몇 사람을 뽑아 예수에게 보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에게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가 7:5) 하고 매섭게 따진다. 대대로 물려온 “조상의 전통”을 지키지 않다니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다. 거룩한 “조상의 전통”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너희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무슨 낯짝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하고 다니느냐는 항변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전통을 철두철미 지키는 데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은 선이고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악이라는 게 그들의 기본 입장이다. 예수 당시 직업상 늘 몸이 더러울 수밖에 없거나 혹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정결법”의 까다로운 규정들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이런 사정은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보다 법을 위에 놓고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죄인으로 내몬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눈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전통(법)만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 전통의 노예가 된다. 어떤 전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통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전통의 형식과 절차가 절대시되고 그것의 내용과 질은 무시된다. 결국 여기에서는 전통이 인간의 생명을 억압한다.

반면 예수의 눈에는 사람이 더없이 소중해 보인다. 사람이 그 무슨 전통보다도 우선이고 위에 있다. 사람이 있기에 전통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전통을 위해 있지 않다는 게 예수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요 종교의 목적이며 전통의 존재 의의라는 기본 상식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앎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점차 시야에서 흐릿해졌다. 사람 대신에 전통이, 인간 생명의 고양 대신에 전통의 준수가, “하나님의 계명” 대신에 “사람의 전통”이 날로 부각되었다. 이렇게 서서히 주객이 전도되다가 마침내는 사람 귀하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 전통만이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으리라.

우리는 이것을 “그때 거기” 2천 년 전 팔레스틴의 비극적 에피소드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 오늘 한국교회 내부에서, 아니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 주객 전도의 서글픈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생명을 꽃피우지 못하는 전통과 종교와 교리를 아낌없이 폐기할 때!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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