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근본정신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 보호에 있다. 출애굽의 해방 전통에 뿌리박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법이 차지하는 의의를 서인석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의 구원간섭으로 자기네 조상들에게 베풀어진 이집트에서의 해방에서 자유를 얻은 백성에게 종살이와 사회 불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회악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이집트에서 빈자, 이방인, 노예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소외되고 약한 빈자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같은 해방신학적 동기가 이스라엘 법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출애굽의 정신은 모세의 출애굽 이후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출애굽의 정신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꿰뚫는 해방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약자와 빈자에 대한 학대는 곧 야훼를 학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확신을 출애굽의 경험에서 얻었다. 바로 이 점이 고대 근동의 모든 법전들을 능가하는 독창성을 이스라엘의 법전들에 부여한다”(『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분도출판사, 63-64, 73쪽).

이 점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구약의 법률자료는 십계명(출애굽기 20:1-17), 계약법전(출애굽기 20:22-23:19), 신명기법전(신명기 12-16장), 성결법전(레위기 17-26장), 제사법전(레위기 1-16장), 그리고 기타 법률자료들로 분류된다. 이 법전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 보호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몇몇 법률조항만 살펴보아도 밝히 드러난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꿔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출애굽기 22:24). “동족인 히브리인이 남자건 여자건 너희에게 팔려 왔거든 육 년만 부리고 칠 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한다.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에는 빈손으로 내보내지 못한다”(신명기 15:12-13).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둬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둬들이지 말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말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 놓아라”(레위기 19:9-10).

하지만 법의 정신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법이 실제로 지켜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스라엘 초기의 빼어난 법정신은 세월 따라 빛이 바랬음을 율법서와 함께 구약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예언서는 잘 보여준다.

“피둥피둥 개기름이 도는 것들, 못하는 짓이 없구나. 남의 권리 같은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빈민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재판해 주지도 않는다”(예레미야 5:28).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것들, 악법만이 밭고랑에 독초 돋듯 돋아난다”(호세아 10:4).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집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아모스 5:7).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들은 들어라. 무엇이 바른 일인지 알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는구나.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미가 3:1-3).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하박국 1:4).

예수 당시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본래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 보호를 목적으로 제정된 법들이 악법으로 전락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려 39가지나 되는 안식일 금지조항이다.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힘든 노동에 지친 이들을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쉬게 하는 것인데, 예수 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루 일해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 사람들을 죄인으로 내모는 악법으로 둔갑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율법논쟁은 법의 근본은 생명 존중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인권 수호라는 예수(운동)의 입장과 인권보다 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 및 율법학자들 사이의 대결이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예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치다가 결국 기존 질서를 위협한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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