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발언이 유출된 ‘시그널 게이트’는, 미국 중심 질서의 기만적 인식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지난 3월 13일, 미국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료들의 내부 통신이 유출되며 이른바 ‘시그널 게이트’가 발생했다. 유럽 국가들을 두고 “무임승차자”, “전쟁을 두려워하는 기생적 문명”이라는 표현이 오갔고, 이 통신은 즉시 유럽 외교가와 언론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유럽 각국 정부의 공식 반응은 의외로 조용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침묵하거나 원론적 입장을 반복했을 뿐, 트럼프의 발언에 맞서 질서를 수호하려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유럽은 분열되어 있다. 독일은 내치에 집중하고 있고, 프랑스는 중도주의 균형을 유지하기 바쁘다. 동유럽 국가들 중 일부는 오히려 트럼프의 포퓰리즘과 노골적인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입장이다. 유럽은 트럼프의 귀환이 야기할 혼란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앞에 어떤 정치적 깃발을 세워야 할지 모른다. 냉정하게는 목소리도 깃발도 내지도 들지도 않는 비참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 침묵은 바로 하나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누군가 채워야 한다면, 지금 그 가능성을 가장 현실적으로 갖춘 나라 중 하나는 한국이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과연 그럴 역량이나 자격이 있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한국은 지금 정치적 혼란기에 있다. 윤석열 탄핵을 둘러싼 헌법적 심판이 진행되고 있고, 국정은 반쯤 멈춘 상태다. 그러나 국내의 혼란과 별개로, 세계는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가 다시 미국을 주도하면서 동맹국과 국제기구를 향한 적대적 언사를 되풀이하고, 자국 이익 외에는 어떤 규범도 존중하지 않겠다는 시그널을 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도 한국 교회도 여전히 조용하다. 아니, 조용하다기보다 익숙한 반응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를 지켜주는 나라”라는 인식, “트럼프는 그래도 기독교의 가치를 수호하는 지도자”라는 내면화된 믿음, “좌파 정부보다 미국의 공화당이 더 낫다”는 이념적 반사신경. 우리는 이 오래된 도식 속에서 한 번도 스스로 깃발을 들겠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지금 트럼프가 말하는 미국은 진정한 동맹인가? 한국산 전기자동차와 반도체를 견제하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중국 견제의 전진기지로만 대하는 미국. 그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우정은 실질적인가, 아니면 과거에 대한 향수인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한국은 이미 “미국의 작은 동생”이 아니다. 오히려 K-콘텐츠는 전 세계에서 문화적 공감을 창출하고 있고, 민주주의는 불완전하지만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위기에 대한 대응 능력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하는 유럽 대신, 먼저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없는 세계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균형과 연대를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외교의 몫이자, 동시에 한국 교회의 몫이기도 하다. 교회는 늘 세계를 향해 말해왔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복음을 말했고, 독재 정권 아래서도 정의를 말했으며, 노동자와 농민, 학생과 도시 빈민의 곁에서 평화를 말했다. 그 교회가 지금, 국제 질서의 전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무관심이 아니라 신앙의 포기다.

우리는 너무 오래, 미국을 ‘하나님 나라가 가장 가까운 나라’처럼 여겨왔다. 자유, 번영, 질서, 선교—모두가 미국을 통해 오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그 ‘가장 가까워 보였던 나라’가 세계 질서를 흔들고, 정의와 평화의 언어를 파괴하고, 심지어 동맹국들을 향해 조롱과 배제를 공공연히 말하는 상황이다.

그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여전히 “미국이니까”라는 말만 반복할 것인가. 유럽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공간이었다. 이제 그 공간을, 한국이 채울 수 있다면—그것은 단지 외교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누구의 말을 따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돌아온 세계에서, 한국 교회는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깃발을 들 것인가. 지금은, ‘우리 안의 미국 바라기 신앙’에 조용히 균열을 내야 할 시간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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