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신학’을 제창하며 문화를 신학의 대화 상대자로 격상시킨 독일계 미국신학자 파울 틸리히. 그는 신학과 미술과의 대화를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Getty Image

현대신학에서 신학과 미술의 대화를 시도한 신학자들은 많지 않다.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아마도 이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신학자일 것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미술은 그의 어린 시절에까지 소급되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루터교 목사인 그의 부친은 당시대의 대부분 루터교회 목사와 마찬가지로 음악에는 큰 관심을 가졌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울 틸리히는 유년시절부터 자연에 대한 사랑과 고틱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즐겨 박물관을 찾았던 그에게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그의 의식을 지배했다.(1)

틸리히의 신학적 사유와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도 미술과의 만남이었다. 28세의 나이에 제1차 세계대전 중 5년 동안 군목으로 재직한 당시, 틸리히는 삶의 추악함과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었다.(2)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파국의 한계에까지 몰아 붙였던 이런 전쟁경험의 한 복판에서 위협받는 틸리히에게 삶의 위로와 질서, 아름다움과 전망을 준 것은 비록 싸구려 복제품이었지만 미술작품들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노래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인 마돈나와 아기 예수’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후에 베를린에서 원작을 보았을 때의 경험을 틸리히는 마치 ‘계시적 성격의 황홀한 느낌’, ‘존재 자체의 능력과의 만남’이었다고 고백했다.(3) 보티첼리의 작품은 르네상스 세계에 속한 것이었지만 잠시나마 전쟁터에서 틸리히에게 불확실한 세계에 닻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보티첼리의 마돈나는 멜랑콜리하면서도 기쁨으로 가득 차있는 표정으로 세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그것의 어두운 면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Sandro Botticelli, 「Mary with the Child and Singing Angels」 (1478) ⓒWikimediaCommons

보티첼리와의 만남 이후, 틸리히는 미술과 신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켰고, 그것은 그 후 그의 신학적 사유형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하였다.(4) 그의 신학적, 철학적 사유로부터 미술에 대한 이해가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미술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그의 신학적, 철학적 사유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5)

틸리히에게 미술은 문화에서 무엇이 배출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지표이다: ‘미술은 오늘의 정신적 상황의 성격을 지시한다. 미술은 과학과 철학이 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즉시적으로 그렇게 한다. 까닭은 미술이 객관적 관찰의 부담을 덜 받기 때문이다.(6) 미술은 개념을 전달하는 언어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해석자에게 인지되게 하는 무언의 계시자인데, 까닭은 미술이 즉시적 직관이라는 논박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표현되기 때문이라고 틸리히는 말한다.(7)

미술과 건축에 대한 그의 강연들과 글들이 여러 문제를 제기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신학자 가운데 틸리히는 신학적 작업에서 차지하는 미술의 역할을 신학적 성찰의 의제로 삼은 유일한 신학자였다. 틸리히의 관점의 한계라면 그가 그의 사고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표현주의 양식(expressionistic modality)이 이미 지나간 것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비록 틸리히가 많은 경우에 같은 주제와 대상에로 되돌아가지만, 놀라운 것은 그가 새로운 뉘앙스를 드러내고, 작품을 보는 신선한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틸리히는 미술이 - 예술 일반도 마찬가지이지만 - 그것만이 줄 수 있는 이해의 여러 국면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술은 다른 감수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또한 우리의 인간성을 온전히 성취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것임을 알았던 아주 소수의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8)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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