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찢어진 양말을 기워 신으며!
▲ 찢어진 양말을 기워 신으며 |
위대한 철학자 헤겔은 한때 양말을 기워 신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찢어진 양말은 기워 신으면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정신은 찢어진 상태를 극복하면 찬란해진다.” 젊은 날 가정교사를 전전했던 헤겔의 ‘물질적 부족’과 ‘정신의 충만’을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훗날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인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모토가 되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아이가 성장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처럼 정신은 자기의식을 갖추게 되면 체세포가 분열하듯 스스로 갈라집니다. 헤겔은 이것을 ‘소외’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자기 내부에서 찢긴 정신은 탕자와 같은 여행을 통해 투쟁과 불화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돌아와 온전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고향을 찾는 오디세우스의 여행이 끝나는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돌아온 탕자’라고나 할까요?
중요한 것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한 개인의 정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정신들의 집합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사회, 국가, 물론 교회)도 개별 정신의 의식처럼 분열과 갈등을 통해 이를 잘 극복하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20대 대선이 끝났습니다. 20대 대통령 당선인은 이번 대선에서 ‘진영논리’가 과열됐던 만큼 지지층에 대한 화답은 물론이고,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들도 포용하는 통합의 정치, 곧 국민통합과 이를 원동력으로 ‘지속적인 국가발전’이라는 책무를 잘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대통령 당선인이 통합과 화합의 정치력을 발휘해야만 국가적으로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국가균형발전, 외교 안보, 경제 양극화, 권력 분산 등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잘 관리하고 각종 현안에 대해 정치권과 협치를 통해 하나하나 잘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민통합을 위해 헤겔이 찢어진 양말을 기워 신듯이, 찢어진 현상태를 잘 극복하여 찬란한 새역사를 창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이자 청년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어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이들을 내쫓거나, 또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지난주 말씀처럼 소동합니다. 걸려 넘어집니다. 이들은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예외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새로운 시대에 해당하지 못하는 자와 또 새로운 세상을 위해 수고하는 이의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청년주일을 맞아 우리 기성세대는 결국 미래 세대인 청년세대를 위해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길을 잘 예비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먼저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교인들과 종교 지도자들!
▲ 카라바조 <예수의 성전정화> (1610) |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고, 두 번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논쟁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이들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이죠? 하나님의 교회를 강도들의 본부로 만든 것입니다.
▲ 20222년 2월 23일 자칭 부산 기독교지도자 100여 명이 신천지, 사이비 무속의 의혹에도 국민의힘 부산시당에서의 윤석열 후보 지지선언을 개최 |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가요? 신천지 이단을 용납하고 사이비 무속을 추종하며 “예수 믿는다, 교회 다닌다.”라고 떠들고 있지는 않나요? 아니,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님께서 만드신 새로운 질서, 하늘의 질서를 따릅니까? 아니면 세상의 질서, 곧 종교를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추악한 욕망의 질서를 따르나요? 따라서 먼저 교회와 교인들이 제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 21:14-17)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높여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노합니다. 사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말씀에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말씀으로 책망하셨습니다. 결국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새로운 시대에 해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구약 말씀에 나오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도 새로운 세상에 해당하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 말씀을 볼까요?
3.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신 3:23-25)
모세는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의 대역사 마지막에, 그 피날레를 장식하고자 합니다. 요단 저쪽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새로운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므리바 물 사건’ 때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이후 갖은 고생을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같이 매일 불평불만을 일삼았습니다. 신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물이 없어서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다툽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3-5)
지도자로서, 리더로서 모세는 변하지 않는 백성들을 보며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이러한 스트레스 때문에 감정적인 행동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이 말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부족하다며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민 20:8).”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평불만이 가득한 이들이라도 그들의 목을 축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계속 민수기 말씀을 볼까요?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1-12)
문제가 생기죠?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모세가 감정적으로 행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는 주체를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함의 대상인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지도자는 그러면 안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실망하고 노하셨습니다. 지도자로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 본문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틴토레토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다>(1577) |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 2:26-27)
4. 사라지는 매개자
여기 ‘너희 때문에’라는 말은 사실 핑계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평생을 잘해오다가, 마지막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 대신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인물, 곧 가나안 시대를 이끌 여호수아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하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라고 하겠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여호수아 사이의 매개자가 되기로 합니다. 이것이 ‘사라지는 매개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수아를 자신을 대신할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신 2:28-29)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라는 책에서 헤겔 철학의 변증법 개념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말을 찾아 사용했습니다. 지젝의 ‘사라지는 매개자’는 본디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개념을 뜻합니다.
지젝은 프랑스혁명 때의 자코뱅당(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하는 정치 결사로 극단적인 평등주의와 폭력통치로 알려졌으며,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1793년 독재 체제로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여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1794년 중반까지 혁명정부를 이끔)이 ‘사라지는 매개자’였다고 말합니다. 자코뱅당은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깨뜨리고 새 체제의 기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뉴웨이브(새물결)를 연 것입니다. 지젝은 “자코뱅당이 사라진 것은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사라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5. 다음 세대에게 민족과 교회의 미래를 맡기라!
오늘 사도행전 말씀에 나오는 바울 역시 모세의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을 불태워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행 21:27-29)
3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이 성도들과 만나 그동안의 전도사역을 보고합니다. 그 후 결례(정결의식)를 행합니다(행 21:24). 이것은 레위기 정결 규례에 따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건너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반-율법적이고, 반-성전적이고, 반-유대적(할례 부정)이다!”라는 것입니다.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이들 유대인들은 이레 동안 걸리는 정결 기간의 마지막 날, 성전의 정결 의식 행사에 참여한 바울을 보고, 주변의 백성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바울이 시내에서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을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간 줄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으로는 이방인들에게는 성전 바깥마당 출입은 허락되었지만, 성전 안쪽 마당에 접근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이것을 위반하는 이방인은 사형에 처하고,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온 유대인은 즉시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가서 성전 안쪽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 버립니다. 이것은 성전 안에 있는 보호구역으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이 소란하여 소동이 일어나자, 로마군 장교인 천부장과 군인들이 개입합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을 구해주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행 21:30-32)
유대교인들은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자신을 불태우기 위해 복음을 위해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후 바울은 2년 정도 가이사랴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됩니다. 꿈에도 그리던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전도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말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을 복음을 위해 사라지는 매개자로 삼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성 세대는 이제 청년 세대에게,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사명을 물려주고,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청년주일을 맞아 다음 세대 청년들에게 이 민족과 교회를 맡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시작에 언급했듯이, 찢어진 양말을 기워, 우리 사회과 교회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을 잘 극복하는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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