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졌지만 우리 마음도 풍요해졌는지는 의문이 든다. ⓒGetty Image

쌀이 똑 떨어졌다

끼니때가 되어서 남은 밥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밥솥을 열어보았다. 바닥이 보인다.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이 적잖이 먹는다. 누렇게 색이 변해서 말라붙은 한 톨의 밥알을 떼어 입에 넣었다. 동시에 생각났다. 쌀이 없다는 것이. 짧은 순간 만에 배가 급격하게 더 고프다.

성미로 밥을 지어 먹는데, 코로나로 교인의 교회출석이 줄었고 성미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모두가 삶이 어려웠던 시절에 십시일반의 사랑과 정성으로 시작된 구제정신이 참으로 아름다운 한국 기독교의 전통이 될 만하다.

우리 엄마도 밥을 지을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한주먹씩 쌀을 집어서 성미주머니에 담았다. 곁에 있던 어린 내게도 이따금 직접 넣어보라고 하셨다. 한 가득을 집으면 작은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더 많이 드리고 싶었다. 이상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잡으려고 크게 손을 펴면 펼수록 더욱 많이, 잘 빠져나갔다. 결국은 딱 한주먹만 남았다. 좀 더 자라고, 그러던 언젠가는 우연하게 깨달았다. ‘아, 이것이 만나와 메추라기의 비유와 같구나. 정해진 분량이면 충분하고, 더 욕심내어도 내게 남는 것은 한 움큼.’ 많이 드리고 싶던 어리고 순수한 마음에 깨닫게 하신 역설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지척인 마트에서 언제라도 쌀을 사다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가? 값을 지불할 돈이 있다. 온라인 쇼핑으로 주문을 하면 새벽과 당일의 배송까지도 언제든 가능하다.

지내던 이전의 목회지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이었다. 우리가 가기 몇 년 전에 깔린 신작로를 마을 어른들은 뿌듯해하셨다. 버스도 하루 서 너 번 다니는 곳이니, 배송된 택배도 면사무소 주재지까지 직접 나가서 받아와야 했다. 인접한 시에 있는 대형마트는 교회의 중고 승합차로 굉음을 내며 털털거려 달려보아도 50분은 족히 가야만 했다. 그래도 쌀은 떨어지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생계를 염려하여 교인과 마을 주민들이 쌀 뿐만 아니라 지은 농작물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엘리야처럼 까마귀를 통해서도 먹이시는 은혜를 경험하였다.

이맘때 즈음, 쌀벌레가 하도 생겨서 앞마당에 넓게 펼쳐 놓았다. 새까맣게 기어 나와서 바닥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쌀을 이리 저리로 훑어보면 다시 나락이 된 듯 낱알을 매달아 고치를 만든 통통한 애벌레가 적잖았다. 징그럽기보다 살이 오른 고놈이 괘씸도 하여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잡아들고 쌀알을 잡아 뜯었다.

한 날은 여든이 넘은 권사님께서 밭에 김매고 가는 길에 들렀다고 오셨다. 마당 앞에 쭈그려 앉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셨나 보다. 속상해 하는 젊은 새댁을 그래도 권사님은 어여쁘고 기특하게 여기셨다. 그리고는 일제와 한국전쟁 때에 궁핍하던 산골의 삶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개간된 지금과 달리 전답도 얼마 없었을 테니 오죽하였으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썩고 쉰밥도 귀해서 씻어서 먹었다는 말을 재미난 옛날 얘기마냥 들려주셨다. 환하게 웃음지어 보이시는 그 주름 사이사이로 굴곡진 삶의 흔적들이 새어 나오는 것 마냥 가슴이 아팠다.

손을 휘휘 몇 번 저으시더니 권사님은 쌀을 자루에 담으셨다.

“사모님, 이거는 내가 가져 갈 끼라요. 새 쌀 가져다 줄테니, 좋은 것 드시라요.”

한사코 거절하는 내 손을 뿌리친 거친 손의 따뜻한 온기가 온 몸으로 흩어져 뜨거워졌다. 미안함과 감사함까지 마음에 뒤엉키니 벌써 저 멀리 가시는 권사님의 뒷모습을 보며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도시 교회에서 밥해 먹는 쌀은 사서 먹는다. 우리 성도들이 섞인 쌀, 성미가 맛이 없다고 싫어하니 그렇단다. 담임 목사님도 그래서 쌀값을 받아 건강을 위해 현미를 사서 드신단다. 어쩐지 가난한 사랑이 그리웠다.

남편이 쌀 한포대를 사들고 왔다. 아침에 밥을 했던 남편은 쌀이 떨어진 것을 더 일찍 알았단다. 어느 집에서 모여온 한 톨들이 모인 성미이기에 그 집들의 쌀독도 바닥난 것은 아닐까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상가교회에서 생계를 걱정하는 후배 목사들도 유난히 생각난단다. 살필 공감의 능력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포대를 뜯어서 밥을 하였다. 뜸 들이는 동안 밥 냄새만도 맛나고 하얀 쌀이 어찌나 기름진지 허기진 배를 채우려 부리나케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뜨거운 밥은 역시나 맛있었다. 그런데, 빈 맛이다. 평소와 다른 맛있는 밥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남편의 말처럼 혹시 성미를 드리지 못할만큼 핍절해진 것은 아닐까 성도들의 형편이 마음 쓰인 탓인지, 떠오른 옛 추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할머니 성도께서 주말농장에서 키워 뜯어 보내신 상추에 된장을 올리고 다시 밥술을 뜬다. 냉장고에 상추가 가득 있다. 이 집 저 집에서 모여왔다.

쌀을 살만한 우리의 형편도 잠시 누릴 뿐인지도 모를 일시적 안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안함으로 쌓지 않는 것은  그렇게 쌓여진 사랑의 경험에서 확신하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유다 백성이 겪는 고초는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일조는 회개의 구체적 표징이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모든 십일조’를 온전하게 바치고, 과연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라고 제안하신다. 올바른 십일조를 통하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서 중요하다는 파격적 제안이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순하게 교회재정을 확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헌금을 올바로 걷는가 만큼 올바로 쓰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성미를 통해 ‘마아세르’와 ‘트루마’를 기억해내고, 십일조 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구약시대도 아닌데 십일조가 필요하냐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복지의 사각, 사회적 약자들이 있다. 사실, 나의 삶도 그러하다.  오늘도 돌보아 주시는 긍휼한 사랑으로 일용할 양식의 감사를 얻는다. 소산을 낼 땅이 없어 무능하고 힘없을지라도 모든 이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내게 주신 사랑을 잘 흘려보내리라.

‘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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