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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禁食)의 죄?(사 58:1-9; 고후 7:2-13; 마 6:16-18)사순절 첫째 주일(3월1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3.08 16:40

1. 사순절을 실하게 보내는 방법

지난 3월 6일 성회수요일(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까지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받아,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지키는 절기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사순절 기간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이자, 죄인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이었습니다. 금식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화되어 성회 수요일과 성 금요일만 금식일로 지켜졌으나, 참회는 여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수난을 준비하는 사순절을 맞아 5가지 영역에서 우리의 실천사항을 다시 한번 되새겼으면 합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사순절을 나름 실하게 보내는 방법’을 첨삭하여 재인용)

1) 부족하게, 불편하게 (절제와 인내)
- 평소보다 적은 생활비 혹은 용돈으로 살기
- 필요한 물건 안 사고 불편하게 지내기
- 운전대 놓고 BMW(bus, metro, walk) 이용하기 
- 1년 안 쓴 물건, 2년 안 입은 옷, 3년 안 읽은 책 정리해서 나누기
- 고난이 찾아오면 쫓아 내지 말고, 손님으로 맞아 불편한 동거하기

2) 자유롭게, 간절하게 (수용과 변화)
- 싫은 내 모습, ‘그것도 나야’ 환대하기
- 반복하는 죄 때문에 더 사랑받고 있음을 고백하기
- 당연하게 여긴 모든 것에 고마워하기
- 익숙함 대신 낯섦 택하기(예: 평소 가지 않던 길로 가보기 등)
- 나의 존재에서 소유까지 ‘급진적 감사’를 드리기

3) 고요하게, 평화롭게 (침묵과 화해)
- 일찍 자고 사순절 새벽기도회 참석하기
- 교단 묵상집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세 본문 주일 설교 말씀쓰기
- 시간 정해서 핸드폰 끄고 지내기
- 깨어진 관계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찾아보기
- 다른 사람 험담하지 말기

4) 정의롭게, 다정하게 (저항과 사랑)
- 전부터 마음이 가는 사회적인 약자와 연대하기
-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한 군데 더 정기후원 하기
-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하기
-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노동자, 특히 단순 반복 노동하는 분들께 감사와 함께 미소짓기
- 일상의 불의를 지적하고 바꿔나가기

5) 푸르게, 느리게 (생태와 생명)
- 심호흡 하며 봄의 기운을 느끼고, 골목이나 공터에 싹트는 새싹에 주목하기
- 장바구니를 가방에 넣고 다니기(비닐봉지 쓰지 말자)
- 어제 ‘남의 살’ 먹었으면 오늘은 고기반찬 멀리하기(패스트푸드 먹지 말고 슬로푸드 먹기)
- 옥상이나 베란다에 올해의 텃밭 준비하고, 실내에 화분과 꽃을 들이기
- 발바닥으로 대지에 자주 입을 맞추고,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기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 세 본문 말씀은 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구약 이사야 말씀은 경건한 척 금식하면서 이웃과 다투며 거짓된 삶을 사는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서신서의 말씀은 금식은 화목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금식할 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입니다.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성도들이 어떤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하는지를 들여 주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본문의 내용이지만 누가복음은 ‘평지설교(눅 6:17-49)’라 불립니다. 신학적인 내용이라 조금 복잡하겠지만, 말씀에 깊이가 있기 위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합니다. 

복음서 네 권 중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신약 신학자들은 공관복음 형성에 관해 두-자료설을 이야기 합니다. 즉, 공관복음서는 두-자료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두 자료는 무엇인가요? 첫째 마가복음서입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이죠. 그리고 마태와 누가에 겹치는 동일한 성서 본문이 있습니다. 이것을 독일어의 Quelle(크벨레), 곧 ‘원자료, 원처, 샘물’이라는 말의 첫 글자를 따서 ‘Q(독일어로 ‘쿠’이나 영어 ‘큐’로 통용됨)’, 혹은 우리말로 ‘예수 어록 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 형성에 관한 두-자료설>

Q는 초기 기독교의 정황과 역사를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초기 기독교 발생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그룹은 ‘출가(出家) 제자’와 ‘정주(定住) 제자’로 구분됩니다. 떠돌이 집단인 출가 제자 그룹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록인 Q로 보존하고, 전승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Q는 마가복음서와 같이 문서로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Q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Q가 선포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찾는 것입니다. 

자, 그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는 ‘산(마 5:1, ὄρος)’에서, 누가는 ‘평지(눅 6:17, ἐπὶ τόπου πεδινοῦ, 낮은 장소)’에서 선포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문제가 아니라, 마태의 삶의 자리, 누가의 삶의 자리를 찾아보아야 하겠죠? 마태복음의 상황, 곧 컨텍스트(context)와 독자는 유대인 공동체입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컨텍스트와 독자는 로마와 헬라 공동체입니다. 누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서신(눅 1:1-3)이라는 것입니다. 데오빌로(Theophilus,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의 고위 관리로 보입니다.

<마태의 산상수훈(사진 위), 누가의 평지설교(사진 아래)>

아무튼 예수께서 산에서 말씀을 선포(산상수훈)하셨다는 마태의 의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은 뭔가 신성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장소가 바로 산이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곳도 산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산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같은 산이지만, 선포된 말씀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상상수훈에서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도 산에서 나타나죠? 마태복음 28장 16절을 볼까요?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ὄρος)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가는 로마와 헬라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페디노스(평평한, 낮은, 평지의)’나 광장인 ‘아고라(Agora,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에서 자유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던 장소로 단어 자체의 의미는 ‘집결지’라는 뜻)’를 중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로마인들이나 헬라인들의 의사소통이 활발하며 자기의 소견을 말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삶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장소입니다. 토론과 연설과 변증이 행해졌던 곳이 바로 ‘아고라(광장)’입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아고라(장터, 개역개정)를 찾아가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했었죠(행 17:17)? 중요한 것은 호로스(산)인가, 페디노스(평지)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선포되었는지를 알면, 더 깊은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아고라(광장) 모습(사진 위)과 아테네 아고라에서 철학자들과 토론하는 바울(사진 아래)>

자,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산상수훈 가운데, 금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금식에 관한 말씀이 없습니다. 헬라인들에게는 금식 규정이 없기 때문에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행위입니다.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일 년에 한 번씩 금식을 합니다(레 16:17-22). 유대의 달력으로는 일곱 번째 달(티슈리, 현재 9월) 첫날에 나팔을 크게 붑니다(나팔절, 유대교의 신년). 그리고 열흘(티슈리 10일) 후에 대속죄일을 선포하고, 모든 죄를 속죄하면서 금식을 합니다. 

이때 두 마리의 염소를 가져와 한 마리를 도살해서 온 백성의 죄를 이 염소에 씌워서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립니다. 죄를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희생양이라고 부르는데, 그 희생양에 제사장이 안수를 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죄가 그 양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 양을 아사셀(Azazel)이라고 하는데, ‘떠나다’는 히브리어 ‘아잘’과 ‘염소’라는 뜻의 ‘에즈’가 결합된 단어로 죄의 짐을 가지고 보냄을 받아 떠나는 염소라는 의미입니다. 어디로 보내나요?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광야로 쫒아 보냅니다.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가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때 하루를 금식한 것입니다. 그리고 5일 후(티슈리 15일)가 되면 초막절이 시작됩니다.

<아사셀 염소, 희생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러한 속죄와 금식의 개념이 변질되어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40일 뒤에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월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게다가 사람이 죽었을 때도 금식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 년에 약 백십일을 넘게 금식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금식할 때 독특한 습관이 있습니다. 얼굴을 씻지 않고 옷을 찢고 재(災)를 머리에 뿌립니다. 자기 수염을 뜯는 사람도 있습니다. 극단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금식에 관해 서로 다 알고 있는 유대인들끼리는 이러한 행위가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방인들이 보았을 때입니다. 이러한 금식은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인과 로마인 등 이방인들에게 이질감을 주었습니다. 더욱이 금식하는 유대인들은 자신의 금식을 경건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금식은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수단으로 변질이 됩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금식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영적 교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18)

‘금식의 죄’입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죄의 문제를 자백하고 참회하며 용서 받는 개인적 경건의 훈련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정죄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3. 참된 금식

이사야 본문 말씀은 종교적 외식에 빠져 경건한 척 금식을 하면서도 자신의 욕심과 쾌락을 위해 사는 유대인들의 종교행위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 하시 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3-5)

말씀의 배경을 좀 살펴볼까요?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페르시아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고레스 왕은 유다 포로들을 성전 기구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고레스 칙령(스 6:3-5)’에 의해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성전을 짓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기초는 세워졌지만, 성전 건축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배도 등한시 합니다. 따라서 성전을 지을 것을 독려하고 예배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한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오늘 말씀의 본문인 ‘예루살렘에 돌아온 제 3이사야(이사야는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제1 이사야, 바벨론의 제2 이사야,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사야)’입니다. 

이 당시 상황은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과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 그리고 포로기 동안 본토에 들어오거나 ‘유입되었던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될 문제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의견도 맞지 않았고, 종교적 형식도 달랐습니다. 게다가 빈부 격차도 컸습니다. 따라서 제3 이사야(사 56-66장)는 종교적 외식 행위인 금식이 아니라, 이웃 사랑의 행위가 올바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금식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따라서 이사야는 백성들의 죄를 까발립니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 58:1)” 그리고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사 58:9b)”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곧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으면, 여호와의 영광이 호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6-9a)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4. 화목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공의를 행하며 의롭게 판단하며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 사랑의 실천과 배려, 더 나아가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는 이러한 화목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고린도 후서는 조금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인 1-9장을 ‘화해의 편지’, 10-13장을 ‘눈물의 편지’로 나눕니다. 따라서 고린도 후서를 읽을 때는 뒷부분 10장부터 읽고, 다시 1장부터 9장을 읽으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럼, 왜 눈물이고 화해입니까? 싸움이 났으니 눈물이고, 다시 오해가 풀렸으니 화해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왜 싸움이 났을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그들(고린도 교회 교인)의 말이 그(바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고후 10:10).” 즉 고린도 전서 말씀을 받아서 교회의 분쟁과 오해가 풀리긴 했는데, 직접 바울을 만나보니,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을 “가짜 사도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등등 가짜 뉴스를 퍼 날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짜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악평을 하고 이간질을 하니,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강물을 흐려 놓은 것과 매 한가지입니다. 

그럼 이 가짜 뉴스의 근원지는 누구입니까?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유대교 교사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유대교 전통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을 비난하기를 첫째, 자신들은 ‘지극히 큰 사도(고후 11:5)’라 말하고, 바울을 예수님의 직계 제자인 사도들보다 못하다고 무시합니다. 둘째,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헌금과 관련하여 바울이 사적으로 돈을 사용한다고 비난합니다(고후 11:8). 셋째, 사도 바울은 자신들과 비교해, 영적으로 자랑할 아무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수 직계 혈통’, ‘물질 문제’, ‘영적 체험’, 이 세 가지로 바울을 깔아뭉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제자인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마침내 디도가 돌아와 고린도 교인들이 모든 오해를 풀고 회개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따라서 기뻐하며 써내려간 편지가 1-9장의 ‘화해의 편지’입니다. 물론 뒤끝이 있는 바울(^^)은 눈물의 편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오해했던 부분들을 다 해명해 버립니다. 개인적인 ‘신비체험(고후 12:1-4)’까지 언급한다는 것은 단단히 화가 났었다는 표시겠지요.

아무튼 본문인 7장은 화해의 편지 부분에 들어갑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울의 심정으로 읽어보면 말씀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쁨의 인사를 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2-4)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처한 선교 상황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고린도 교회와 오해가 풀린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5-7)

그런데 8절 부터는 조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이 잘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그 편지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 동안이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알고 내가 후회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기쁘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 일로 인해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한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된 일이니, 결국 여러분이 우리로 해서 손해 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고후 7:8-9)

쉽게 말해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고린도 전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오해를 풀고자 격노한 심정을 담은 편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읽고는 분실한 것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로 인한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λύπη, 슬픔, 비관, 고통을 의미)’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바울에 의하면 근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κατὰ Θεὸν λύπη)’이 있고, ‘세상 근심(κόσμου λύπη)’이 있습니다. 먼저 ‘세상 근심’은 말 그대로 슬퍼하고, 비관하고, 고통스러워,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입니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이고, 좌절에 빠져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판단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가는 근심입니다. 일찍이 신학자 매튜 헨리는 이것을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하며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입장에서 바울은 오해를 푸는 화해의 결론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공동번역으로 보아야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전에 내가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써 보낸 것은 그 못된 짓을 한 자(거짓 교사)나 또는 그에게 손해를 입은 사람(바울이나 디모데) 때문에 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보인 열성을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보여주려고 쓴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디도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더욱 기뻤습니다. 디도는 이제 여러분 모두의 덕택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고후 7:12-13)

분쟁은 쉽고,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부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고 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화합, 어울림을 추구하되, 획일적인 같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소인은 획일적으로 자기와 같을 것만을 요구하지,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크리스천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1520년 11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서 사랑으로 산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를 너머(above himself) 하나님에게 이르고,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보다 아래로(below himself) 내려온다.” 

루터는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선행이 선한 사람을 따르고, 그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루터의 말입니다.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못한다.” 금식이나 그 어떤 율법적인 행위와 공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신앙이 우리를 선하게 만들 것입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 것입니다(마 7: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부족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사순절의 의미가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죄를 짓고, 그것을 회개하기는커녕,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파스칼은 『팡세(Pensées, 생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궁지에 빠진 인간은 진실에 직면하여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참된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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