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카오스) = 여성 = 드래곤

문명사를 살펴보노라면, 세계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거의 예외 없이 우주가 혼돈이나 무(無)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아직 아무런 구별이나 분별이 생기지 않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혼돈과 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혼돈은 바다와 강을 상징하며, 동물로는 용(龍), 의인화 될 때는 여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문명은 이 혼돈스러운 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이다(治).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1:1-2).”고 말한다. 즉 어둠과 혼돈, 그리고 어둠과 물 같은 것이 태초에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인 헤시오도스(Hesiodos)는 『신통기』(Theogonia)에서 창세 신화를 다음과 같이 들여준다.

즉, 카오스로부터 가이아(땅)와 타르타로스(캄캄한 심연)와 에로스(사랑)가 생겼고 이어서 에레보스(지하의 명부와 세계)와 니크스(어둠의 밤), 아이텔(광명의 세계)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초의 모습으로 누트(Nut)라는 무정형의 모호한 혼돈의 존재가 있었으며, 누트가 라(Ra)라는 태양을 낳아 세상이 밝고 명확해졌다고 믿었다. 창세기의 창조설화에 막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에 의하면, 혼돈은 타아마트(Tiamat)라는 여신으로 불리웠다. 티아마트는 창세기의 혼돈인 ‘테홈(Tehom, 깊음)’과 그 어원이 같다.(각주 1)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작은 신들은 이 혼돈의 갖가지 얼굴에 지나지 않다. 혼돈의 여신 티아마트는 혼돈에서 어떤 존재가 빠져 나와 무형의 혼돈을 파괴시키며 우주의 유형적 질서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혼돈의 괴물들을 풀어 세상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러나 끝내 마르둑(Marduk)이라는 땅의 남신이 혼돈을 정복하자 세상은 혼돈의 어둠에서 빠져 나와 밝고 환해졌다.(각주 2)

인도나 중국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의 인드라(Indra)는 밝음과 질서이며, 이는 흑암과 무질서의 브리트라(Vritra)를 물리친다. 중국의 창조설화에 의하면 ‘양’(陽)이란 밝은 빛이 혼돈의 어둠을 뚫고 나와 세상을 창조한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이아와 그의 자녀들

그러나 특이한 점은 혼돈 혹은 카오스에 대한 시각이 동양과 서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혼돈에 관한 이야기는 『莊子』 「內篇」 “應帝王篇”에 나오는데, 그것은 혼돈(混沌)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앙의 임금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 남해의 숙(儵)과 북해의 홀(忽)이 마침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없는 혼돈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루에 한 번씩 칠일동안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주었으나, 7일째 그 혼돈이 죽고 말았다(각주 3)는 소위 ‘숙홀의 오류(숙과 홀을 합치면 ‘갑자기’라든지 ‘잠깐 사이’를 의미한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혼돈과 애매성을 그대로 내버려둬야지 거기에 인위적인 작위성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동북아문화권의 입장이다.

질서(코스모스) = 비카오스 현상 = 남성 = 문명

인도-유럽 쪽의 문명권에서는 되도록 혼돈을 파괴시키려 한다. 다시 말하면 서양문명사는 끊임없는 혼돈과 질서의 투쟁사였다. 이러한 신화에 나타난 혼돈과 질서의 싸움은 과학사 속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초기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철학자들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아낙사고라스는 물, 불, 공기, 흙에서 우주가 나왔다고 함으로써 혼돈을 자연의 제 현상으로 보고 질서화 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철학사(과학사까지 포함하여) 속에서 생긴 최초의 비카오스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 4)

서구 철학사의 기초를 다진 아리스토텔레스는 혼돈을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라고 정의하고는 그것을 최고의 높은 위치에 놓고 거기에 이르는 존재의 대 계층 질서를 만들었으며, 중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계층질서를 ‘무생물-식물-동물-천사-신’의 순으로 놓았다. 존재의 위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혼돈을 ‘부동의 동자’라고 정의해 놓고 계층질서를 만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근대과학의 고질적인 질병인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만들게 된다.

혼돈을 견디지 못하는 서구인들은 혼돈에 질서와 위계를 부여함으로 혼돈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며 이러한 파괴가 본격적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의 과학자들, 즉 갈릴레이, 뉴턴, 케플러, 데카르트이며 우주의 모든 질서를 수학적인 법칙으로 유도해 낼 수 있다고 장담한 라플라스(Pierre Laplace)등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라플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한 순간에 우주 상태가 주어진다면, 뉴턴의 운동 법칙들에 의해 전체 우주의 미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 5)

카오스모스(혼돈 속 질서, 질서 속 혼돈)

1870년 볼츠만(Ludwig Boltzmann)은 거시의 세계에서는 질서가 생기지만 원자와 같은 미시의 세계에는 무질서가 따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앙리 푸앵카레(Anri Poincare)는 볼츠만의 생각을 우주세계 속에다 옮겨 놓고 생각해 보았다. 달과 지구라는 두 물체만 놓고 법칙을 세우면 거기서 나름대로의 질서가 성립된다.

그러나 거기에 태양이라는 제 3의 존재가 끼어들면 질서는 깨어지고 만다. 즉 뉴턴 공식이 두 물체 사이에서는 적합하지만 태양이나 다른 행성이 나타나면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처럼 20세기의 물리학(각주 6)은 앞서의 기계장치의 우주관에 종말을 선포했으며, 혼돈의 여신을 죽인 두 장본인 마르둑과 뉴턴-라플라스 대신 볼츠만-푸앵카레를 통해 이 가엾은 여신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

그러나 다시 부활한 여신은 그 옛날의 카오스 여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양자역학과 카오스 이론으로 대표되는 20세기 물리학의 이러한 불확정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결정론적(deterministic)인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마르둑과 뉴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가령, 양자역학에 있어서 비록 어떤 특정한 양자과정의 결과를 확정 지울 수는 없지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상대적 확률들’이 결정론적 방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가 비록 어떤 경우에라도 ‘양자역학적 주사위를 던진’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그 내기의 확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정확히 알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양자 물리학은 우연을 현실의 기본 조직으로 삼고 있지만, 뉴턴-라플라스적인 세계관의 흔적을 여전히 가지는 것이다.

카오스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는 불규칙해 보이는 현상들 가운데서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어떤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인데, 그 혼돈된 상태를 공간적인 구조로, 즉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으로 표현한 프랙탈(fractal) 이론을 살펴보면 볼츠만-푸앵카레의 혼돈의 흔적아래 마르둑과 뉴턴-라플라스라는 질서가 꽃을 피우고 있다. 도형의 ‘자기 유사성’(각주 7)을 가진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구조라고 하는데, 프랙탈은 카오스를 기술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으며(각주 8) 이 프랙탈 이론을 통해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카오스 이론의 등장으로 규칙적인 현상이나 운동을 다루는 고전 물리학이 무용해졌다든지 이 이론으로 서양 이성의 몰락을 읽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 것이다.

마르둑과 뉴턴-라플라스가 혼돈에 질서를 부여했고,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 볼츠만과 푸앵카레, 혹은 현대 물리학의 이론은 질서를 해체하고 혼돈을 내세웠지만, 최근의 이론들은 혼돈 안에 질서를, 질서 속의 혼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사상가들의 사유 속에 잘 나타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탈 중심화된 중심으로 카오스모스(Chaosmos)를 통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오스모스는 카오스적 코스모스, 무질서한 질서, 혼돈의 질서, 복잡계의 질서 등의 의미이다.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 역시 그러하다. ‘그늘’과 ‘흰’에 대한 김지하의 말을 들어보자.

애증(愛憎), 사랑도 증오와 함께 공존하는 것일까? 모순이 드러나는 이러한 삶의 주름을 김영민은 『진리․일리․무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김영민의 다음의 말은 현 시대 혼돈과 질서에 관한 최종적인 인문학적 대답이 되며, 영화 <마더!>의 불편한 진실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말이 된다. “나는 진리(眞理)의 강박만큼이나 무리(無理)의 춤사위에도 비판적이다.”(각주 13)

최병학 기자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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