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군사독재의 피해자다.
정치인도 아니고 이 땅의 기득권자도 아니며 가진 자도 아니다. 나는 단순양민으로서 군사정권의 폭력에 의하여 젊음을 빼앗겼고 정신이 병들어 고뇌하고 아파했다. 그리고 보았다. 군사정권의 정치군인들과 탐관오리들에 의하여 양민들이 신음하는 현장을, 그래서 나는 국가 공권력이 악한 이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면 그것은 폭탄이 된다는 논리를 온 몸으로 직접 배웠다. 그래서 정통성 없는 기반위에 세워진 정권에 의하여 탄생된 정권은 국민들 스스로가 투쟁하여 정권을 부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청교육대를 다녀온 후 국민이 직접 뽑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하여 열심히 뛰었고 민주주의를 외쳤으며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나는 정치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도 없었다. 다만 정권교체의 욕구는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 그것이었다.

울산대학교 이노형 교수와 논쟁이 붙었다. <당신은 왜 김대중을 지지하느냐>고 내게 공격했다. 나도 물었다. <그럼 당신은 왜 백기완을 지지하느냐> 이교수가 답했다. <백기완은 민중후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말했다. <김대중은 당선 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나도 백기완선생을 좋아하지만 당선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역사는 단계적 발전이다. 먼저 당선 가능한 김대중을 당선시켜 놓고 다음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이교수가 말했다. <제도권에서의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그렇다면 당신도 제도권 안에서 교육을 포기해라. 교수직 포기하고 바깥에서 천막을 쳐서라도 개인 사숙을 열어 민족교육을 가르쳐라> 이교수가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 이후 그 친구와 나는 대통령선거와 정치적 견해로 인하여 결별하고 말았다. 그랬다. 모든 것은 순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계단식으로 발전하고 전진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을 지지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견해는 후회하지 않는 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제15대 대통령선거 거리 연설회

나와 아내는 김대중대통령선거본부 선거연설원을 맡았다. 연설원은 시. 군. 구에서 2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나는 김대중선거본부 수산해양특별위원회 부위원장도 맡았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를 경남으로 불러내려 경남 수산인 100인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내가 사회를 본 그날 경남수산인 선주 1백 여 명이 입당을 하는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경남지방에서는 DJ하면 전부 머리를 흔들었다. 그를 싫어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참 가관이다. 첫 번째는 <그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싫다.>그러나 그는 결코 빨갱이도 아니고 민주투사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다. 라고 말하면 그 다음엔 <전라도 사람이라서 싫다.>다. 그게 무슨 싫어하는 이유가 되냐며 도리어 그는 지역감정의 피해자다. 라고 따지면 마지막엔 <절름발이라서 싫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이유가 안된다며 논리를 펴면 <무조건 김대중은 싫다>라고 말한다. 이런 정서의 경상도에서 김대중에 대한 선거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김대중은 무조건 싫다>라고 말하는 경상도에서 우리 부부는 마이크를 번갈아 가며 외치고 다녔다. 목이 쉬도록 김대중 지지를 외쳤다. 연설을 하고 있으면 어떤 사람은 주먹총을 먹이기도 했다. 다들 시큰둥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지나친다. 다만 호남 출신들이거나 지역감정을 초월한 극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다.

어쨌든 아침 8시, 눈을 뜨면 차에 올라 유세장으로 나갔다. 점심 먹는 시간외엔 연설을 하거나 조직을 만든다. 아내도 여성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원들을 만나 하부 조직을 독려키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키도 한다. 그러면 짜장면 한 그릇으로 때우며 당선되면 1등 동지로 대우 해주겠다고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여 돈 요구를 가라앉힌다. 어떤 땐 호남사람들이 찾아와 왜 자신들은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당신들은 영남에서 가만히 있어 주는 게 선거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건 맞는 얘기다. 경상도 사람들은 호남사람만 만나면 도와줄 일도 도와주지 않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조직원들은 어쩔 수없이 호남향우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대통령선거 현장이었다.

그러나 호남인사들에게 일을 맡기면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남에서 만난 호남인 김영환씨 부부는 횟집을 하면서 살아가는 선량한 민중이다. 그들은 우리가 김대중당 10년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불평을 하거나 맡는 일을 거부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언제가 표 나지 않게 정권교체의 당위성을 실천한다.

또한 영남인이면서도 김대중씨와 아내의 국회의원 선거를 목숨 걸고 도와준 사람도 있었다. 경남 양산 동면의 조소영씨의 경우다. 김대중선거를 도우면 주변의 질책이 따가울텐데도 마다않고 앞서준 사람이다. 후에 그는 김대중씨로부터 표창장과 감사장도 받았다. 경남 양산에서는 누구도 김대중씨가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꿈도 꾸지 않았다. 우리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 누구도 내가 하는 정권교체의 선거운동 일을 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양산 지역구에서 조차 천대를 당한다. 지구당 대회를 열려고 농협 강당을 빌려 달라고 했더니 신한국당(한나라당)은 빌려주면서 우리는 절대 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아내의 국회의원 선거를 해도 그 흔한 화분 한 개도 들어오지 않는다. 친척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친사촌도 외사촌도 어느 누구 하나, 아내의 선거사무소를 찾아준 이도 없었고 격려전화 한통도 없었다. 주변에는 오직 선거에 관한 한 우리 편이 없었다. 격려도 없었지만 신념하나로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고 한 표를 호소한다.

그리고 각 지역 조직 책임자들을 모아 격려하고 희망을 얘기한다. 그 다음엔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서로 어깨동무도 하고 서로 격려한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김대중 영남 조직 계보, 그런 세월을 10여년을 보냈다.

▲ 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

15대 대통령선거 개표 날이었다. 우리 지구당 선거본부는 개표장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을 했다. 한나라당도 이회창후보 측 참관인들이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다. 우리는 사람도 몇 안 되고 그쪽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추종자들이 줄을 서있다. 그러나 참관인수는 제한이 되어있기 때문에 동수로 마주보고 앉았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우리 양산 지역구는 이회창 표가 압도적이다, 그쪽은 숫자가 택시미터기 요금처럼 빠르게 올라가지만 우리는 느릿하게 올라간다. 그 모습은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턱 막힌다, 그러나 역대의 어느 대통령선거보다 그래도 표가 제일 많이 나오는 경우라고 하여 위안을 삼고 있었다. 이회창씨표가 40%대로 넘어 설 즈음 우리 표는 겨우 10%대로 머물고 있다. 지역감정의 벽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초저녁엔 이회창씨가 우리후보보다 조금 앞서 있었다. 그때마다 한나라당 쪽에서는 함성을 지르고 우리 측에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우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쪽 참관인 측에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히 우리 자리 쪽을 지나다니기도 하며 흘끔거리며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선거 개표 결과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김대중후보가 1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측 참관인들의 어깨가 쳐지는 순간이었다. 순간 우리가 이기는 소식이 터져나올땐 우리 측 참관인들이 <와-아>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화면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고 그 이변 앞에 사람들은 벼락 맞은 사람들처럼 멍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선관위 위원장(현역판사)이 웃음 띈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며 <이 선생님, 축하합니다.> 인사를 건넨다. 아마 자신들의 공식 라인으로부터 우리가 모르는 어떤 정보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의외의 인사를 받고 <감사합니다>했지만 참으로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표는 계속 상승국면을 타 개표 마지막쯤에는 사십만표 이상으로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엎치락덮치락 했지만 계속 우리 후보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우리 측 참관인들은 완전히 고무되어 있었고 전국의 TV생방송에서는 김대중씨의 당선을 점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정을 넘어서는 김대중씨가 몇 십만표 차이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1위 김대중 10,326,275표 (40.3%)
2위 이회창  9,935,718표 (38.7%) 1.6% 차이
3위 이인제  4,925,591표 (19.2%) 

우리는 우리 선거 역사 이래 처음으로 당선의 영광을 맛보았다. 그 당선은 김대중 한사람의 당선이 아니라 이 십여년을 민주화의 길목에서 뛰어온 사람들과 정권교체를 열망해온 국민들의 당선이었다. 우리 선거본부는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새벽까지 춤을 추고 노래부르고 웃다가 울다가 목이 쉬도록 <민주주의, 정권교체 실현>을 외쳤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후 우리 주변엔 이상한 변화의 조짐들이 일기 시작했다. 나를 보고 <빨갱이>니 삼청교육대를 다녀온 <깡패>니 <사기꾼>이니 하는 비난들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멸시 당하던 고향을 가면 옛날의 그 조소어린 얼굴들이 아니라 누구나 손을 잡고 반가워하며 나를 일부러 만나려 하는 사람이 생길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내가 무슨 큰 권력가나 되는 것처럼 청탁이 들어오기도 했다. 지역구 사무소에는 지역구 사람들의 청탁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우리는 당선사례 방송도 하지 않았다. 당시는 외환위기를 겪을 IMF시기였으므로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일체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집안에 박혀 선거업무종사자만 만났고 잡음이 일 사람들은 경계했다.

외신에서는 대한민국에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며 대서특필들을 해대고 있었다. 그랬다. 50년만의 정권교체는 우리 민족의 소망이었지만 내 개인의 소망이기도 했다. 나는 이젠 더 이상 가슴속의 열망은 없었다. 이젠 나의 일을 하리라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나의 최대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이적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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