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당신은 5공 피해자중의 최고의 피해자이면서 어째서 그런 사람을 살려두느냐고, 당신들이 나서서 그런 사람은 죽여 버려야 되질 않느냐고, 그는 입에 개거품 까지 물어가며 나를 향해 질타를 한다.

글쎄다. 개혁이란 것이 살인을 해서 될 것이라면 누구도 살인을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살인이란 합리성이 아무리 갖추어져 있다 하여도 살인 뒤에 주어지는 정당행위를 말하기는 어렵기 마련이고 도리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기가 더 십상이다. 도리어 살려놓고 두고두고 괴롭히는 것이 그 효과는 더 클 것이다. 사형보다 무기징역형이 더 고통스럽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어쨌든 전두환 씨는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삼청의 양민들을 잡아다 자신의 입지를 위하여 괴롭히다 못해 죽음에 이르게 해놓고도 뻔뻔스럽게 연희동 호화주택에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내 자신도 그런 전두환 씨를 보면 고통스러웠다. 우리 민족은 잊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아니면 용서해주기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아무도 전두환 씨의 죄상에 대하여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즈음 나는 계속 전국을 순회하며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도덕성에 대하여 질타를 하며 돌아다녔다. 지명수배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탄압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단지 내 신분이 옛날엔 자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책을 판매한 베스트셀러 작가란 점이 옛날과 다르다면 달랐다. 그랬기 때문에 정보경찰도, 옛날처럼 함부로 나를 대하지는 못했다.

정보기관은 여전히 나에게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고 기회만 있으면 엮어 넣으려고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간첩단을 조작할 수도 있었고, 진급에 눈 어두운 수사관들도 실적을 위한 예전의 향수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 98년 8월 12·12 및 5·18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전두환과 노태우.

그날의 강연제목은 삼청교육대와 민주화였는데, 미국의 군사정권과의 먹이 사슬을 주로 이야기했고, 이 땅의 민주화의 고삐도 그들이 쥐고 있다는 요지를 이야기했다. 삼청교육대나 광주학살문제도 미국의 봐주기에 의하여 이뤄지고 있음을 목청을 높여 외쳐댔다. 그런데 유독 눈을 반짝거리며 앞좌석에서 나의 말을 기록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겉으론 강연을 꼼꼼히 들으려는 학구파였지만 나이가 듬직한 모습은 틀림없이 정보원이라는 직감이다.

강연을 마친 뒤에는 그는 내가 가는 좌석마다 따라다니며 앉아 있곤 했다. 그런데 후일 대통령 선거 때 내가 부산선거대책본부 대변인을 맡아 있을 때 무척이나 안면이 많은 친구 한명이 나를 찾아왔다.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내 정보담당을 한 적이 있다며 인사차 왔다고 한다. <죄송하지만 그때는 이 대변인님의 집 숟가락 까지도 자기가 다 알고 있었노라고 고백을 했다.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름이 쫘-악 끼친다.

그런데 이 친구가 <오늘은 이대변인님께 좋은 정보를 하나 주고 가겠노라>고 말한다. “내일 아마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갈 모양입니다, 아마 삼청교육대 문제도 거론 할 모양입니다.”

나는 세상 태어나서 정보형사한테서 정보를 받기는 처음 이었다. 나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왜 그대가 내게 이런 정보를 주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내 속이라도 빤히 드려다 보듯 <앞으로 좋은 시대가 올 것 같은데 그때 대변인님 많이 좀 도와주시죠. 허허>하고 미리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 뒷날 그러니까 95년 12월 3일로 기억된다. 나는 침을 삼키며 아침 일찍부터 TV를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뉴스 속보가 나왔다. 오늘 전두환 씨가 짤막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은거키 위하여 떠난다는 멘트가 나왔다. 하마터면 나는 고함을 지를 뻔 했다. 드디어 민중의 승리인가 싶었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나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다들 우리가 이겼노라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물론 감옥에라도 보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는 감옥도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다가왔다. 드디어 TV에 전두환씨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표정은 침통해 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 온 글을 방송사기자들에 둘러싸여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그는 잠시 운을 뗀 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삼청교육대 피해자여러분께도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짤막한 요지의 항복문서를 읽었다.

나는 잠시 엎드렸다. 그리고 임근실의 얼굴을 떠올렸다. 죽어 지하에서 임근실이 웃고 있을 지 울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전두환의 얼굴위로 임근실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지난 1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역시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역사는 진실한 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 길로 전두환은 국민적 여론에 떠밀려 백담사에서 처절한 귀향살이를 한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요강단지를 방에다 갖다놓고 소변을 보기도 한다고 했다. 백담사에서 추운 겨울을 몇 번인가 넘긴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YS 정권시절 전두환과 노태우는 쿠테타의 영광을 뒤로 하고 감옥으로 구속이 된다. 쿠데타 주역들이 재판정에 서서 재판을 받을 때는 장관이었다. 지구상에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동시에 재판정에 서는 부끄러운 뉴스가 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내가 투쟁한 세월도 무의미한 세월은 아니었던 듯싶다. 3년 동안의 감금세월과 두 번의 구속, 그리고 10여 년간의 진상규명 투쟁이 봄눈 녹듯 가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결코 지나간 악몽의 역사는 잊지는 말자고 다짐을 한다.

이적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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