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30일 일요일, 맑음

“너 잘났어.”라든가 “너나 잘 하세요.”라는 대사를 쓰면 안 되는 사이가 부부다. 하지만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억누르기 힘들 경우에 써먹을 만한, 연속극 ‘미생’에 나왔다는, 명대사를 김선생이 알려주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다만 이 대사의 경우 그 한 마디로 그쳐야지 거기에 토("그렇지만"이라든가 "그런데 당신으로 말하자면" 등)를 보태서는 안 된단다.

어제 저녁식사 후 문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는 어제 축일을 지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며 시어머니로는 고약했던 성녀 모니카며 아내를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며 특히 요즘 아내인 나를 대하는 보스코의 언사를 관찰한 결과를 두고 오래오래 토론과 대화를 가졌다. 사람마다 자기 상처에서 눈을 뜨고 그 상처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보다. 우리 부부가 원심력과 근심력으로 팽팽하게 마주 도는 관계라는, 두 사람의 평도 나왔다.

보스코가 간혹 나에게 이런저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열 가지 이유를 꼽을 경우,  고개를 끄덕이며 다 듣고나서는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거야.”라고 대꾸한다든가, “내가 그렇게 착하고 고분고분한 여자라면 결혼 한 주일 앞두고 집을 뛰쳐나와 당신을 따라나섰겠어?”라고 재세할라치면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한 숨만 쉬고 마는 보스코.

그는 기껏 해야 “아, 술란 술란! 아, 술란! 술란~ 블루!”(O, mamy blue 투로)라고 흥얼거리고 내 입에선 “앞으로 ‘술란 블루’ 내 앞에선 금지곡이야.”라는 말이 나오곤 하는데 엄마에게만 아니고 부부간에도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작동하는 것일까?

오늘 점심 식탁에서 오티나 부부에게도 그 문장(Grazie, per bell'informazione!)을 알려주었더니만 어찌나 좋아하든지, 알프레도가 당장 아내에게 써 먹는 것을 보니 모든 부부가 사정이 어슷비슷한가 보다. 비엘라와 코사토 두 군데에 의원을 열고 바쁜 의사 아내를 대신해서 살림과 요리와 텃밭 농사를 남편 알프레도가 도맡는다.

그랄리아 성지의 마지막 미사

그랄리아 성지의 성탄 세트

아기 예수의 할례

엊저녁 먹은 게 잘못되어 김선생은 “접시 하나 들 힘도 없이” 망가졌다는 진단을 아내에게서 받고 집에서 하루를 쉬었다. 오전에는 ‘그랄리아 성지’에 올라가 11시 미사에 참석했다. 인생을 살아보니까 인간만사가 하느님 손길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의 백발노인들이 모여든 자리여서 성당 안은 간절하고 경건한 표정들이다. 성당 부속 경당들에는 예수 성탄, 동방박사, 성전봉헌, 예수할례, 이집트 피난 등의 장면이 실물크기 토기로 구워져 세워져 있다. 2000년 역사 가톨릭교회의 시청각교육은 참 대단하다.

12시 40분에 오티나네를 보러 칸델로에 갔다. 석 달간 집을 통째로 빌려준(그것도 2007년, 2012년에 이어 세 번째다) 인심에 고마움을 표하는 점심인데 알프레도의 모친도 우릴 보고 싶다고 나오셨다. 우아한 투피스에 연하게 화장을 하고 단아하게 앉아계시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아유, 곱기도 하셔라. 잘생기고 점잖은 영감님 만나 데이트도 하셔야겠어요.” “아유, 여자 나인 이십대에나  곱다고 하지 내 나이가 92세야.” “이십대엔 누구나 예뻐요. 어머니 연세에 이렇게 고우신 게 진짜죠.” 이런 대화가 오가면 아들 알프레도가 더 좋아한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우리 인사말에 안나마리아는 그랄리아 집이 팔리더라도 칸델로의 집 4층이 늘 비어 있으니 다음에도 자기 집에 머물러야 한다면서 우릴 초대한다. 보건복지부 보건행정을 담당해온 문선생은 이탈리아의 가정의(家政醫)에 관해서 이것저것 묻고, 이 나라 의료제도에 대해서 긍지가 대단한 안나마리아의 초대를 받아 문선생은 11월 중에 이곳에 와서 실제로 가정의들의 활동을 직접 관찰하가로 정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에게 놀러오는 사람한테마다 칸델로 안내를 하게 되었다

칸델로 명소 '피난처'(Ricetto)를 문선생에게 구경시켜 주고, 그곳 자그만 공간에서 칸델로 의전담당 부시장이 중년 남녀의 결혼식을 주례하는 장면도 보고, 그랄리라로 돌아와 짐을 싸고, 이번에 만난 지인들에게 오후내내 전화로 작별인사를 하고, 저녁을 먹은 뒤 자정을 알리는 경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셋이서(보스코는 요즘 밤이면 으례 '새나라의 어린이')경당 앞 공원에서 기우는 보름달을 쳐다보며 알프스 자락의 아름다운 세월을 한참이나 얘기 나누고 들어오니 밤도 한참 깊었다. 내일이면 그랄리아를, 이탈리아를 떠난다.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의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아름다운 문화 유적을 떠난다.

이탈리아 결혼은 성당에서 하거나 시장(혹은 그의 대리인) 앞에서 거행해야 한다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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