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15일 토요일, 오전에 맑다가 저녁엔 비

아침 7시에 식구들이 다 일어나 모두 바삐 움직인다. 어제 밤 빵기와 내가 짐을 거의 다 챙겨 차에 실었으므로 아침엔 남은 짐만 챙긴다. 꼬마들까지도 자기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걸 보면서 여행에서 얻어지는 또 하나의 소득이 정리하는 일을 배우고 버릴 것 버리는 일을 배우는 듯하다. 밤늦게 보따리를 싸는 빵기를 보며 “저 애는 늘 어딘가로 떠나는 데 이력이 났구나! 늘 지구상의 어려운 곳을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다니!”하는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보였다.

9시경 집주인 여자가 와서 우리가 깨끗이 정리한 집을 살펴보고 우리더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빵기네의 길이 멀어서 먼저 떠나보내고 우리는 카날레다고르도의 끝 간 데에 있다는 발디바레스(Val di Bares)로 들어갔다. 차가 들어가는 마지막 동네에 주차를 하고서 ‘폭포’가 있다는 데까지 둘이서 산보를 하였다. 어제의 폭우와 이른 아침이어선지 산행하는 사람들을 두세 쌍밖에 못 만났다. 산마르티노 어느 능선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물길이지만 굉장한 폭포는 아니었다.

11시에 카날레 성당에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한다는 콜롬비아인 페르난도 신부가 우리 빵고신부처럼 ‘아르바이트 사목’을 와서 미사를 집전하였고 벨루노 신학생 양성을 위해 특별모금을 하기도 했다.

미사 후 바로 곁에 있는, 어제저녁의 그 식당에서 피자를 먹었다. 어제 밤 마주 앉은 두 손주가 반찬노릇을 했었는지 오늘 두 접시를 시켜 우리 늙은이들이 마주 앉아 먹는 피자는 어제밤처럼은 맛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카날레 동네 뒤안길을 한 바퀴 돌았다. 예컨대 동네 옛 읍사무소는 1640년에 지은 건물로 이 산골마을의 모든 가장들이 모여 읍장을 선출하고 모든 대소사를 의논하였단다. 마을의 모든 집은 이 집을 기준으로 지어야 했단다. 아이들마다 방을 하나씩 주고 자녀가 결혼을 하면 마치 다세대주택처럼 살림을 꾸리게 하였다니까 그럴 만도 했다. 지금도 부모가 죽으면 주택과 농토를 자녀수대로 분배하는 전통 그대로다.

우리가 한 주간 묵은 발레디비오이스를 떠나서 왼편으로 올라 발레스 고개(Passo di Valles)에 이르니 까마득한 옛날 리타와 함께 들렀던 경당이 바라보여 한참 가슴이 저렸다. 장소에 따라서는 추억이 뿌듯하기도 가슴이 저리기도 하는 게 여행길이고 또 인생이기도 하다.

롤레 고개(Passo Rolle)에서는 빗방울이 후드득거려 우산을 쓰고서 웅장한 산마르티노 산악을 올려다보고 반시간쯤 걷다가 산마르티노카스트로짜(San Martino di Castrozza)로 내려가다 이레네가 점원을 하는 크리스마스 가게에 들렀다. 이태전에 이루어진 그니의 결혼을 축하하고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자 그네도 내게 알프스 식탁보를 하나 선물해 주었다.

▲ 1998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내 친구 세레나의 묘소에서

오늘 목적지 트란스아콰(Transacqua)에 이르러 세레나의 묘소를 먼저 찾았다. 세레나의 무덤엔 말라버린 꽃과 십수년전 내가 가져다 놓은 작은 인형만 쓸쓸하다. 무덤은 떠난 사람보다는 남겨진 사람에 따라서 보살핌이 다르다. 아내가 아직 건장한 가정은 무덤도 잘 손질되어 있지만 남자만 남겨진 무덤은 삭막하게 마련이다. 다른 묘소에 성묘온 할머니 두 분이 호기심을 갖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서 40여년 된 우리의 우정을 얘기했더니만 (세레나의) 남편이 재혼했지?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할머니들 세대에서는 일부종사의 검은 상복이 기품이기도 했었지...

우리가 오길 기다리던 마리오는 그간 지내온 얘기며 이레네와 결혼하게 된 사정이며 의붓딸의 얘기, 볼로냐에 사는 두 아들 만리오와 플라비오 얘기를 길게 풀어놓아 우리가 찾아오길 잘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레네가 퇴근하는 대로 저녁을 차려먹고서 네 사람이 이웃동네에서 베니스의 플로리안 바에서 밤마다 연주를 한다는 실내악단의 연주를 한 시간 넘게 들었다. 머리가 허연 주민들과 앉아서 빗속에서 듣는 슈트라우스 음악과 나폴리 칸조네와 최근 유행하는 음악들은 참 흥겨웠다. 마리오의 의붓딸 우르술라가 근무하는 대형피자식당에 들러 이레네의 딸내미를 보고 음료를 한잔씩 마시고 집에 들어오니 산마르티노 자락에서도 자정이 넘었다.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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