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올림픽이 북한의 불참으로 군사정권의 반쪼가리 행사가 되고난 2~3년 후 어느 날 내게 중요한 연락이 하나왔다.

당시 나는 호구지책으로 다니던 신문사를 잠시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전히 신문사 일 외에 대학에서 시국강연과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도 매우 바쁠 시기였다. 우리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언젠가는 정권교체가 되어 이 땅에도 민주주의가 올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민주화된 조국을 가지려면 정권교체가 필수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과 정권교체는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 가쁜 정국의 대치상황에서도 우리도 자유롭지가 않았다.

당시는 김대중, 김영삼 씨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덕분으로 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곧 이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노태우, 김종필 등과 손잡아 3당 합당을 선언한 후 민자당을 창당할 시기였던 것으로도 기억이 된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군사정권과 한통속이 되기를 자처 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 제의를 김대중 총재에게 먼저 제의했지만 김대중 총재가 거절 했다는 설이 있었다. 나는 DJ를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 의문을 물어본 적이 없어 아쉽다.

어쨌든 다음 대통령 선거는 민자당 후보와 김대중 후보로 치러질 선거가 될 것이었고 그 선거가 바로 코앞에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DJ로부터 <콜>을 받았다. DJ는 내게 말하였다. <이 동지, 우리 함께 손잡고 정권교체 합시다> 그 말은 절박했다. 아니 역사적 사명과 같은 말로 귀에 울려왔다.

나는 그때부터 서울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내려가 부산신학교 출신으로서 운동성향을 가진 최경호 전도사를 불러 함께 정권교체 운동에 투신하자고 했다.

▲ 1987년 13대 대선 당시 김대중 평민당 후보의 대구 유세. (출처:유튜브, MBC 갈무리)

당시 DJ는 영남 지역이 골칫거리였다. DJ를 무조건 빨갱이라 매도하던 영남지역 유권자나 정치인들은 DJ를 곱게 봐주지 않았고, DJ를 대리하는 지구당조차 맡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줄을 서려면 국회의원 배지를 쉽게 따는 통일민주당이나 여당에 줄을 서려 했다. 그러다보니 DJ의 평민당에는 선명한 야당 성향을 가진 사람이나 재야운동을 하는 민족민주계열의 양심적인 사람들만 욕심 없이 DJ를 도우고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한 축에 끼어드는지 DJ는 내게 부산 경남지역을 맡아서 선거를 치러 달라고 하였다. 나는 애당초 정치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다. 다만 <정권교체는 꼭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철저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는 나중에 정당 일을 도우면서 깨닫게 된다.

정당판 이란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는 사명론자보다는 배지 달아 출세하겠다는 출세자들이 득세하는 곳임을 순진한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내가 국회의원 배지에 욕심을 두었더라면 나는 DJ로부터 서울에서 공천을 받아 배지를 달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통 나란 놈은 그런 세속적인 출세주의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주변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어리석음> 그 자체라고 했을 것이었다.

실제 부산의 최모 의원과 김모 씨는 날더러 신선 같은 부처라고 빈정거림인지 칭찬인지 뜻 모를 농담을 자주 던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나는 그때부터 DJ가 평민당과 신민주연합을 합하여 통합신당을 만든 신민당 부산동래지역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DJ로부터 국회에서 임명장을 받았다.

그 때 풀뿌리 지자체가 처음 실시되는 지방선거가 있던 해였다. 부산에서도 부산시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나는 대변인을 맡았고, 동래선거구에 후보를 내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잘 알려 진대로 부산에는 김대중 씨 측 후보를 구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겨우 동래 제2선거구에 진모 후보를 내세웠다. 나와 진모 후보는 시장 바닥을 훑었다.

진 후보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였지만 친구로 지내고 있어 허물이 없던 사이였다. (물론 나중에 나를 힘들게 하고 홀로 딴 배를 타고 떠났지만) 그와 난 사실은 지방선거를 치루는 것보다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 표를 모으고 다니는 처지에 가까웠다. 어차피 당선은 되기 힘든 지역이었으므로 정권교체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걸어가는 멀고 먼 여정이었다.

그러나 진모 후보는 항상 주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김대중보고 야당 후보 하지 않았다. 이적 보고 김대중당 후보 되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발상이라고 나는 자주 지적을 하였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김대중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적보고 김대중당 후보로 뛰고 있다고> 그렇지만 후일 그는 김대중 씨가 정권을 잡았던 시절, 그는 김대중 정부의 시혜로 부산교통공단의 간부직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세상이 바뀌자 형식적으로 김대중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들이 김대중 씨에게 절대 충성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다.

나는 초대 지방선거부터 시작하여 13대, 14대, 15대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선거 두 번 등 깡그리 김대중당 선거에 내 젊음을 소비했다.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를 위하여 영남지역에서 배 곯아가며 20여년을 송두리째 내 청춘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을 따르는 지방 정치인들 가운데는 중앙에서 배지를 달고 거들먹거리는 현역 원내 의원들보다 원외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위원장들이 참 많았다. 특히 부산에는 김대중의 정치적 불모지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더 많았는데, 호남에 가면 김대중당의 후보일 경우 작대기만 세워 놓아도 당선이 가능하여 정치적 출세주의자들이 줄을 섰지만 부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오로지 정권교체의 순수한 열망으로 김대중당에 헌신하는 분들이 몇 분 있었다.

그 중에 이흥록 변호사가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었다. 이 어른은 재야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분이다. 당시 이변호사는 부산지역의 시국변론과 인권변론을 도맡았던 사람으로 시국변론하면 <이흥록>, <이흥록>하면 <시국변론 변호사>를 떠올릴 만큼 그는 돈 안 되는 일에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당선도 안될 평민당 부산지부장을 맡아 김대중씨와 정권교체를 위하여 헌신 해 오고 있었다.

그는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고 다니며 한 번도 그는 조국의 미래에 대하여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씨를 따라 갔더라면 몇 선의 국회의원을 했을 사람이었다. 김광일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이분들은 전부 김영삼 씨 밑에서 공천을 받아 전부 국회의원을 한번 이상씩 해먹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흥록 변호사만큼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과 맥을 같이 하는 <당>에서 지조를 지키며 헌신해 왔으며 아직까지 배지 한 번 달아보지 못하고 또 훗날 정권이 바뀌었어도 그 흔한 <낙하산> 공기업의 <장>자리 하나 수혜 받지 못하였다.

내가 입당 했을 때 이흥록 씨는 부산지역의 지부장이었고 나는 한때 그 어른과 같이 신민당 대변인으로 활동을 했었다. 90년 초에는 부산 재야의 대부격인 최성묵 목사가 입당을 했다. 당시 이우정, 김말룡, 최성묵 목사 등 3인방이 김대중 씨에 의하여 스카웃되었는데, 이우정씨와 김말룡 씨는 배지를 한 번씩 달 기회가 있었지만 최성묵 목사는 그렇지가 못했다.

당시 김대중, 김말룡, 이우정, 최성묵 이렇게 네 분이 당의 간판격인 공동 최고위원을 맡았는데, 최성묵도 그 중에 한사람이었다. 부산에서는 김영삼 씨가 배신을 하여 민정당으로 합당을 하여 가버린 후 이기택 씨가 노무현등과 한 정파를 형성하여 민주당 간판을 달고 있었고 이흥록, 최성묵, 이적 등이 김대중을 대표로 한 신민당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최성묵 목사가 최고위원일 당시 지방선거를 치루고 난 후 당시 이기택 씨가 이끌던 <꼬마 민주당>이 우리 신민당과 합당을 하게 됐다. 최성묵 최고위원과 우리는 아주 잘된 일이라고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개인 최성묵은 그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이글은 한국정치사의 비사라고 하여도 될 최성묵 최고위원의 죽음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부분이다.

91년 가을 이었을 것이다. 나는 최성묵 최고위원과 용두산 밑에 있는 용두골이라는 주점에서 만났다. 여간해서는 술을 먹지 않는 최 최고위원이 막걸리 한잔을 먹고 나서 나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합당을 하고 나니 재야의 새까만 후배인 노모 변호사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더럽고 치사해서 도저히 그들과 같은 산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재야 때는 그렇게 알랑거리더니 정치판에서 자신이 조금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해서 사람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적어도 재야 출신이라면 합당이 되어 꼬마민주당이 부산정서에 부합된 기득권을 많이 갖고 있더라도 지금까지 고생해온 평민당, 신민당 출신 당료들에게도 인사 정도는 있어야 될 것 아니야는 것이다.

특히 최 목사가 부산재야의 대표를 맡고 있을 때 노씨는 새까맣게 아래인 집행위원장 출신인데, 어떻게 이렇게 선배를 철저히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심지어는 <이 친구 어디 두고 보자>는 뼈아픈 말을 했다. 나는 양측을 다 알고 있는 처지로서 뭐라 대꾸 할 말이 없었다. 달리 위로의 말밖에 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는 <통합민주당>부산시지부에서 비주류로 나가 떨어졌다. 노씨가 지부장이 되었고 최성묵 최고위원과 이흥록 변호사와 나는 그동안 맡았던 지부 살림에서 손을 뗐다. 원래 지부의 기득권을 갖는 사람이 전국구도 받을 수 있고 중앙정치 무대에서도 지방 대표권과 정치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공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지부 기득권은 지역정치인들에게는 정치적 생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치무대에 갓 들어온 최성묵 최고위원이 재야까지 떠나가면서 선택한 미랜데, 새까만 후배인 노씨에게 밀려 버렸으니 최 최고위원은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나는 <최고위원님, 김대중 총재께서 은혜를 꼭 하실 겁니다.>하고 위로를 했지만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최 최고위원의 그 웃음은 내가 보는  마지막 웃음이 되고 말았다.

<필자 소개> 이적 목사 약력 -1957년생 경남 통영 출생. -1986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안개속으로><연작시 삼청교육대10> 등으로 신인추천.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구금, 88년 <미주중앙일보> 정화작전 연재 91년 <대한매일 창사기념/ 장편소설 적도> 당선, 80년대 군사독재 저항문인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회원> <민예총 창립회원> 1987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최초로 폭로한<삼청교육대정화작전/전예원 87>발간. 이후 <장편소설 북방산계곡의비밀/90광야> 장편실록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정치평론<대통령의 늦바람/남풍89>등이 있으며 시집 으로 <바스티유의땅/한겨레 88><이별과절망의둔주곡/ 푸른숲91>< 바다가 된 그대에게/ 새암바다/2000>등 기타 <김대중 살리기 공저><분단과통일시 1,2집/공저><사람과문학/ 공저>등 20여권의 작품집이 있다 현재 저항문인 단체인 <분단과통일시 동인>, <우리시대의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경기도 김포시 <민통선평화교회담임 목사>로 시무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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