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3일 목요일, 맑음

“여보, 베니스에서 뭐 더 보고 싶은 것 없어요?” “없어, 이 더위 속에서는....” 우리가 이 아름다운 베니스에 와서 지낸 날짜를 모두 세면 여러 달 될 게다. 그 일에 제일 편의를 봐준 사람은 폰타나(Fontana) 가족이다. 바깥주인은 빵기와 빵고가 어렸을 적에 ‘지오 마씨밀리아노 (Zio Massimiliano: 마씨밀리아노 삼촌)라고 부르고 보스코는 무조건 '대장님'(capo)'이라고 부르던 사람이다. 늦깎이로 고등학교에 들어가 그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여선생님에게 라틴어를 배우며 들볶였다. 그 처녀선생님이 소리를 지르면 그 커다란 학교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고 학생들은 쥐구멍을 찾았다는 것이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리날도 신부님이 80년대에 우리에게 들려준 얘기다.

그런데 그 늦깎이 학생이 그 호랑이 여선생님과 결혼했다. 오늘 우리가 만나러 간 부인 까를라(Carla)다. 보스코는 그분을 ‘진짜 대장님’이라고 호칭해왔을 정도로 여전히 그 집에서 휘두르는 분은 부인이다. 사회의식이 철저하여 정치활동도 하고, 당신이 낳은 아들 프란치스코(지금은 소설가)가 있음에도 한국 아이 둘을 아들딸로 입양하여 산드로와 안나로 반듯하게 키우면서 “한국이 이탈리아와 우리 집안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이 두 아이를 나에게 보내준 일”이라고 자랑할 정도다. 오늘도 나이든(89세) 그니의 기품있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한 여인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분들이 1979년 입양아들에게 조국을 보여준다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가 체칠리아 수녀님의 소개로 우이동 우리 가난한 집을 방문한 것이 두 집안의 우정을 낳았다. 80년대 유학시절 우리가 베니스로 올라올 적마다 이 가족은 우릴 먹여주고 재워주고, 마씨밀리아노는 베니스 구석구석을 데리고 다니면서 안내와 해설을 해주었고, 알프스를 같이 가서 한달 가까운 휴가를 보낼 적마다 어린 빵고를 어깨에 목말태우고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던 등산가였다.

그가 유식하게 베니스 미술관과 성당들을 안내할 적마다 그의 모든 강연을 충실히 귀담아 듣고 알프스에서 그가 산행을 하자고 할 적마다 기꺼이 따라나서던 ‘유일한 쫄병'(unico soldato)이 보스코여서 대장과 유일 쫄병의 우정은 두고두고 이어져 왔다. 수년전부터 척추를 앓아온, 나이 90세의 이 대장은 체소하고 등 굽은 노인의 모습으로 바뀌어 오늘 보스코가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까를라는 여전히 기품과 기운을 한데 간직하고서도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숨 쉬는 게 인류에게 죄스럽다”는 한탄을 한다.

아침 10시 경 산마르코 광장으로 갔다. 미루네는 오붓한 두 사람의 베니스 관광을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불볕더위에도 그 넓은 광장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20여분 줄을 선 끝에 산마르토 성당에 들어가 성당과 제단 뒤에 있는 보석 팔리움 성화판(聖畵板)도 둘러보고 성모경당 옆 조배실에 성체가 현시되어 기도를 하고 경당에서 미사가 있어 참석하였다.

산마르코 성당은 베니스공화국 군주(doge라고 불렀고 선출직이었다)의 ‘개인경당’이었고 그해서 구석구석에 도제들의 석관과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다. 누구나 죽으면 성당에 묻혀 그곳 제단에서 떨어지는 은총의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싶으리라. 중앙제단에 모셔진 복음사가 마르코의 유해는 십자군 전쟁 때에 베니스군이 훔쳐온 것이다. “내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바울로 서간의 한 구절이 석관에 새겨져 있다. 베니스는 물론 옛 베니스공화국에 속했던 모든 지역에 사자상이 발견되는 까닭은 복음사가 마르코의 상징물이 사자이기 때문이다.

산마르코 광장을 한 바퀴 돌고 층계에 주저앉아서 싸간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 보스코가 ‘베니스 미술 비엔날레’ 안내판을 보고 필이 꽂혀 구경하러 갔다. 25유로나 하는 입장료를 내고서도 "세계의 미래 전부"라는 주제의 엑스포 절반만 보고 말았다. (절반은 아르세날에서 개최되고 있는데 폰타나 가족을 보러 가기로 한 약속 땜에 포기해야 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한두 사람을 선정하여 대규모의 설치미술을 전시한 것인데 인간 존엄과 반독재, 반소비주의와 환경보호의 주제가 공통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한국관은 문경원, 전주호 두 작가의 ‘우주공간을 열고 날으는 법’이라는 주제를 달고 있었다.

▲ "그자들은 가면을 썼고 갈수록 본얼굴이 그 가면을 닮아갔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메스트레의 폰타나 집엘 갔고, 두 노인이 우릴 맞아 40년 우정을 되뇌이며 환담하고, 뒤이어 퇴근길에 안나와 남편 시모네가 도착했다. 카를라는 우리를 맛있는 피자집으로 데려가서 저녁을 대접하고, 식사 후 안나와 시모네가 우리를 베니스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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