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3일 토요일, 맑음

하늘이 맑을수록 마음이 암울하다. 이 나라의 정치적 발전을 기대하는 진보적 국민들에게 과연 무슨 희망과 염원이 남아 있단 말인가? ‘노짱’이 세상을 버리고 우리를 떠난 후 ‘멘붕’이 되어 정신적 좌표 없이 헤매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선까지 사기로 치르고서 아직도 그날의 절망에서 발을 못 빼고 있다. 오늘 봉화마을에 모인 수천 명은 각자 ‘노짱’에 대한 자기만의 추억을 한 가닥씩 간직하고서 이 험난한 시대를 견뎌내고 있으리라. 한때 행복했던 추억이 당장의 암울함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 있다. 성당에서는 아직도 부활시기를 지내는 중이다.

오늘 ‘노짱’의 아들이 피를 토하듯 내쏟은 말들을 귀가 있으면 듣고 심장이 있으면 새기리라. “우리는 너희의 악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한다! 반드시 딛고 일어서리라! 꼭 보여주마!” 김무성 같은 기득권자들은 확인사살을 하러 온 걸까, 사살을 확인하러 온 걸까?

그의 집이 아방궁이라고 조중동이 짖어댈 때에 송 신부님이랑 봉화마을 그 응접실에 갔었다. 소박한 원목 식탁에 평범한 의자를 우리에게 권하며 “여기가 아방궁입니다.”라고 쓴웃음 짓던 얼굴이 잊혀 지지 않는다. 보스코의 공직생활중 청와대 만찬에서 다섯 번, 그분의 교황청 방문때, 그리고 봉화마을 방문에서도 언제나 수수하고 서민적인 인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노짱’을 만나 방구들장 신부님이 그렇게나 행복해하던 모습도 벌써 6년 전 일이다.

유영님씨가 태국산 대마줄을 한 상자나 보내왔다. 현지를 방문한 길에 그것으로 방석이라도 짜볼까 사왔다는데 포기하고서는 시골에선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서 내게 보냈단다. 당장 오늘 휴천재 데크 밑의 수세미가 타고 올라갈 줄로 묶어 주었더니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서울집 비자나무 묶는데도, 내년엔 배나무 가지 묶는데도 써야겠다. 내게 당장 필요 없는데 남들에게 유용할 것이 있는지도 살펴보아야겠다. 사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12시 30분, 산청에서 요양 중인 실비아 수녀님에게 초대받아 산청 ‘홍화마을’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광주에서 ‘성모무용(聖母舞踊)’을 하는 김원춘(신티아)님이 와서 공연을 하는 자리에 우리 부부를 부르신 것인데 점심은 진주에서 온 자매님들이 샀다. 2시 30분에는 산청면 ‘어리내’(어천마을)에 있는 수녀님 오빠의 별장에서 무용이 있었다.

신티아씨(나와 동갑)가 어쩌다 성모무용을 하게 되었는지를 40여분 들려주는 히스토리가 참 흥미진진하였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하면서 불교, 원불교, 개신교로 옮겨 다녔는데 교회 목사와 장로가 대립하여 갈라지는 기회에 숙모가 “어야, 왜 큰집 두고 작은집에서 맘고생 하는가?”라는 충고를 듣고 학운동 성당엘 다니게 되었단다. 성모신심을 ‘마리아숭배’라고 주입받아선지, 가톨릭에서 유난히 성모신심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강도를 맞고서도 무사한 사건이 일어났고 남편의 갑작스러운 과로사로 인한 충격을 이겨내면서 ‘성모무용’을 하게 되었단다.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를 10여분에 보여준 무용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실비아수녀님을 위시해서 20여명의 여인들(남자라곤 보스코와 성심원 유 신부님 둘뿐) 앞에서 감동적인 공연을 해주었다.

오늘 그 모임은 성심원 유 신부님의 칠순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스페인 선교사 프란치스칸으로서 40년 한국생활에서 무려 35년을 성심원에서만 보내온 분이다. 그토록 가난하고 먹을 것 없던 성심원 나환우들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여태까지 살아온 분으로 나환우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사랑한다. 정말 무엇을 선택하고 어느 길을 가느냐에 따라 우리 모두의 구원이 좌우됨을 그분의 삶에서 볼 수 있었다.

휴천재에 돌아와서 보스코는 데크 난간에 사포질을 하고 나는 그간 밀린 빨래와 다리미질을 하였다. 텃밭으로 내려가 BMW를 물에 타서 캄캄해질 때까지 우엉과 양파 그리고 감자에 거름을 주었다. 우리 집 옆의 이장님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양파는 (잎이) 누워서 큰다는데 함양 일대의 양파밭이 무슨 전염병으로 누렇게 타버려 농부들의 가슴이 여간 무겁지 않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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