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19일 목요일 설날, 맑음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새해 첫날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민수기 6,24-26)이라고, 이스라엘 성전에서 새해에 행하던 축복이라고 전해오는 말씀이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행복한 마음이다.

▲ 우이성당 미사, 분향, 세배

몇 해 전 “부자 되셔요.”라는 터무니없는 말마디가 새해 인사로 통했단다. 돈만벌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한심스러운 생각을 드러낸다. 오늘 미사 중의 강론에서 신부님은 “잘 될 꺼야.”가 금년의 인사말로 뽑혔더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이 시국과 경제와 인심을 두고 얼마나 긴장하고 절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제단에 차례상을 차려놓고, 교우들이 두 줄로 나와 분향을 하는 합동차례도, 미사후 신부님과 수녀님들과 함께 교우들에게 세배를 하는 모습은 참 흐뭇한 정경이다.

8시경 호천이네 차가 우리골목에 들어서고 이어서 호연네 차가 도착하여 주차했다. 엄마가 와 계신 오빠네 집에 맨 늦게 도착한 것은 오빠네 집과 제일 가까운 나였다. 둘째 올케가 며칠간 만져드린 머리며 말끔한 얼굴로 엄마는 아들딸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 설날 예배

▲ 아들들

▲ 며느리들

▲ 성서방의 기도

▲ 엄마의 눈길에 "저 딸도둑놈!"하는 (당신 평생 가장 가슴아팠던) 기억이 잠시 되살아나신 듯

언제나처럼 9시경 설날예배를 드린다. '성서방' 보스코의 짧은 기도에 뒤이어서 설교를 맡은 오빠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를 전망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자세를 두고 기다랗게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젊은 세대라곤 호연네 아들 진이와 원이가 이 세상 젊은이 모두의 죄과를 뒤집어쓰고 젊은 세대를 대표해서 무릎을 꿇고 들어야 했다. 한 반 급우들이 모조리 결석하고 출석한 두 놈만 꿇고서 결석한 놈들의 모든 잘못을 대신 야단맞는 형국이었다.

듣다못해 “오빠, 나 배고파. 우리 교황님도 7분을 넘기는 설교는 마귀의 몫이랬어.”라는 내 한 마디 어리광에 오빠가 열변을 멈추었고 두 젊은이는 긴 훈시에서 놓여났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서 오빠 별명이 ‘이빨’이다.

▲ 엄마의 식사전기도는 음정도 내용도 수십년 장로님의 기도빨 그대로다

세배를 하는데 이제는 세뱃돈 드릴 대상이 엄마뿐이다. 아이들이 다 취업하여 밥벌이를 하는 만큼 이젠 우리가 조카들에게 용돈을 받을 차롄가 보다. 우리 주변에는 아들들한테 용돈을 받는다면서 흔들어 보이는 여자들이 간혹 있는데 그 돈으로 커피라도 사는 일 없으니 용돈을 못 받는 우리가 더 형편이 나은가 보다. 우리 사촌 호덕이네도 도착해서 세배를 나누고 환담하다 설악산에 온 가족을 집결시킨 누이 희경이를 찾아간다면서 서둘러 떠났다. 아예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휴양지의 호텔과 콘도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연휴를 보내면서 제삿상도 차리는 문화가 늘어나는 추세라나....

점심을 먹은 뒤에 ‘임헌석의 톡톡건강법’이란 프로를 다시 보기로 온 가족이 TV 앞에 섰다. 나이들이 ‘오로지 건강’에 관심갖는 세대에 들어섰다는 표다. 엄마는 소파에서 연거푸 졸고 계신다. 어젠 호천에게 두 시간 가량 끊이지 않고 얘기를 하시는데 옛날 얘기는 어제처럼 선명하고, 얼마 전의 얘기는 희미하고, 방금 전의 얘기는 까맣게 잊는 식으로 엄마의 기억은 실타래가 얽혀 있더란다. (“엄마, 전한규가 누구야?” “우리 시동생이지!” “엄마, 얘가 한규 작은아버지네 큰아들 호덕이야. 이쪽은 그 색시고 이쪽은 그 손주고.” “응, 그래?”) 엄마가 자식들 외에는 사람들을 못 알아보시는 것은둘째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체 흥미를 안 보이신다.

양로원에 함께 계시는 이모 옆방의 할머니가 통증과 우울증을 못 견뎌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모가 무척 힘들어하는데도 엄마는 주변일에 도통 관심을 안 가지신다. 기나긴 여생을 감당하기 힘들어할 때에 치매는 어쩌면 어린애처럼 단순한 생각으로 돌아가는 자기보호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형제들이 엄마를 모시고 헤어져 각자 처가로 떠난 다음 나는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 계산동에 계시는 대모 김가브리엘 수녀님(얼마 전 베트남 선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셨다)께서 내 설 인사를 받으실 시간이 오늘 저녁뿐이라고 하셔서 4시 반경 집을 나섰다. 그런데 5분 거리의 4.19 네거리 앞에서 무려 한 시간 넘게 정차하는 바람에 손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일 아침 일찍 인천에 다녀와야겠다.

▲ 오빠네 골목풍경

▲ 올케가 그린 새 두 마리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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