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9일 월요일, 맑음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겨울사랑”)

고속도로 옆으로 보이는 먼 산엔 아직도 눈이 쌓여 있어 서로 만나야 할 사람들의 만나야 할 날들에 대한 추억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오후에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교부학회(敎父學會)’ 모임이 있어 보스코를 참석시키러 88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생각은 먼 날로 돌아가 있다.

“수도원 기행” 1, 2를 쓴 공지영 작가가 왜 하필 분도수도원을 선택했을까? 그니의 얘기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한국 전쟁 당시 저 "바람찬 흥남부두"에 정박해 있던, 선원 12명이 타는 화물선에 1만 4천명(14,000!)을 태우고 남한으로 피난을 시킨 배가 있었단다. 그 후 그 배의 선장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려 누구도 알아낼 수가 없었단다.

▲ 김은경님이 보내온 라루 선장과 라루 수사님 사진

그러다 미국에 있는 분도수도원에서 한국수도원에 자기네 수도원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단다. 인수나 운영이 힘들리라 생각하면서도 탐사차 찾아간 한국수도자들을 그곳의 늙은 수도자 한 분이 꼭 만나보고 싶어 하더란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바로 그 노인 수사가 바로 51년 전 흥남 부두에서 피난민을 실어다 살려놓고 미국사회에서 자취 없이 사라진 선장 레너드 라루더란다. 노인은 한국에서 파견된 수사들을 만난 지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단다. 그 일화에 감동을 받은 한국 수사들은 그 수도원을 맡기로 결정했단다.

70년대 곧 우리 신혼 초 보스코가 광주가톨릭대학에서 내는 신학계간지 ‘신학전망(神學展望)’을 편집할 적에는 해마다 네 번이나 그 잡지의 최종교정(‘OK 놓는다’고 했다)을 보러 출장을 오곤 했으므로 나도 몇 번 따라온 적이 있다, 심지어 어린 빵기도 데리고. 성탄절이면 임세바스티안 신부님이 출판사 고객들에게 포도주와 소시지를  선물하여 우리 집 성탄절의 귀한 음식으로 내놓던 일이 기억난다.

독일인 임세바스티안 신부님은 많은 곤란을 겪으면서도 한국사회가 꼭 필요한 책들을 선구적으로 출판해 내신 것으로 유명하다. 보스코가 1978년에 번역한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解放神學”을 비롯한 아시아의 해방신학 책자들은 한국의 민주화, 크리스천들의 사회참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회에 학문적 토대가 되는 교부(敎父)들의 책을 내는 ‘교부총서’에 실린 아우구스티누스 저서들은 현재까지는 거의 보스코의 역주본(譯註本)들이다. “그리스도교 교양”, “참된 종교”, “자유의지론”, “신국론”, 보스코의 근년작업 “삼위일체론”이 그렇다. 재작년에 임세바스티안 신부님의 장례식에 보스코가 추도사를 한 것도 까닭이 있다.

교부학회에 모인 학자들이 학술발표를 마치고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6시의 대성당 성무일도에 함께 참석한 것도 뜻 깊은 자리였다. 어둑한 조명이 밝아지면서 수사님들이 줄지어 성당으로 입장하는 행렬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람이 진정 추구해야 할 근원적 갈망을 보여주는 암시였다.

저녁식사 후 교부학회 참석자들이 나누는 친교의 시간에는 참석자들이 나름대로 자기소개를 하고 소감을 나누는데 어떤 목사님은 이 출판사가 낸 퀴블러로스의 “인간의 죽음”으로 간암말기의 아버님을 떠나보냈다면서 역자인 보스코를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는가 하면, 젊어서 “해방신학”에 접한 중견학자들, 보스코가 지은 라틴어 교재로 공부한 소장 학자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인용하면서 역자인 보스코에게 감사하는 사람들 등등이 밤늦게까지 화담을 나누었다.

▲ 오른쪽부터 박현동아빠스, 보스코, 노성기광주가대총장, 이형우아빠스, 장인산 학회장신부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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