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살짝 뿌렸다. 갓 튀겨 낸 도너츠 위에 살짝 뿌려진 분당(粉糖) 같다. 오늘은 2015년의 새해, 1월 1일이니 한국가톨릭에서는 ‘천주의 성모 대축일’ 의무축일(가톨릭신자가 주일처럼 미사참례 의무가 있는 날)이지만 날씨가 너무 춥다. 그것보다 더 추운 건 사람들의 마음이다.

 

공소는 오늘 예절이 없다니 어딘가 가야 하는데 인월 공소에 9시 미사가 있다고 해서 그리로 가려다 오상선 신부님과 미루씨가 있는 성심원의 9시 30분 미사에 가기로 했다. 함양은 너무 춥다. 마음이 추우면 발길은 그곳에서 차츰 멀어져만 간다. 신자들의 멀어지는 발길을 그 자리로 돌리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하느님만 하시니까 그분께 부탁을 드린다.

 성심원은 본래 나환우들의 집이므로 나병이 거의 퇴치된 지금은 나이든 분들만 130여명이 남이 있단다. 성당 전체에 특유한 냄새가 난다. 보스코는 그 냄새에 익숙하단다. 어려서 중고등학교 시절 교장 마신부님을 따라 ‘현애원’(玄愛院)이라는 나환우촌에 주일미사 복사 하러 자주 갔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단다. 보스코 오른편에 앉은 노인은 보스코가 평화의 인사를 하면서 잡아보니 손가락이 하나도 없더란다.

 나병의 요체는 피부 통각(痛覺)의 상실이다. 아픔을 모르면서 손발가락을 잃고 눈이 멀고 한단다. 보스코의 그 말에 퍼뜩 깨달았다. 아하, 연말연초에 내 가슴을 무겁게 누르는 통증이 한국사회의 나병(癩病) 때문이구나! 세월호에 300명 어린 생명들을 물속에 가라앉혀 죽이고도 아픔을 못 느끼는 집권세력, 국민의 눈을 가려 그 희생자들과 가족에게 무관심하고 매몰차고 냉정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국민의 양심에 나병을 대량으로 주입시키는 주류언론들, 그래서 무조건 기득권을 옹호하는 나병에 걸려 세월호도 쌍용자동차도, 국정원 대선개입도 청와대 문건도 진상을 모르는 절반 국민이 눈이 멀어 방황하는 나라! “눈 먼 자들의 도시” 대한민국! (보스코의 시국평론 인터뷰가 오늘 "민중의 소리"에 실렸다. http://m.vop.co.kr/view.php?cid=832294)

 

오늘 성심원에서는 힘들어서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분, 앞을 못 보는 분, 말을 못하는 분들도 미사를 보고 있지만 그래도 이 미사에 온 분들은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이고 아예 자리보전한 환우들이 상당수란다. 그분들을 위해 수십 년간 봉사해온 프란치스코회 수사님들에게 깊이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부는 거의 해마다 인도를 방문할 만큼 인도인들의 영성(靈性)에 깊이 심취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 집에 20년 넘게 키운 개가 있어 늙고 병든 데다 앞을 못 보게 되자 인도여행도, 국내여행도, 심지어 친지방문도 포기하는 그분들의 여리고 여린 동정심을 보았다. 미물인 강아지에게도 스무 해쯤 함께 살면 저런 동정심을 품는 것이 인간이거늘, 한겨레인 젊은이 300여명을 물에 빠뜨려죽이고서도 “고만 좀 해라.” “시체 장사 그만두라!” “박근혜가 세월호 주인이냐?”고 소리 지르는 저 불한당들, 매춘언론 화면에 나와서 지껄이는 저 지식인들은 도대체 무슨 좀비들인가!

 미사 후 오 신부님 방에서 미루씨 부부와 함께 차대접을 받으면서 담소하다 함께 휴천재로 돌아왔다. 산청에 들러 나는 떡국떡과 굴을 사고 미루씨는 케이크를 샀다. 이사야씨와 나는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이어서 미루씨와 나는 매생이국으로 떡국을 끓였다. 그렇게 떡국으로 (이사야씨를 뺀 우리 셋은 매생이국에 떡 세 조각씩 넣어) 새해를 맞고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었다. 떡국 양으로 미루어 올 한 해는 좀 부실할 것 같아서 벽난로에 구운 고구마와 미루씨가 사온 케이크도 한 조각씩 먹었으니 새해를 번듯이 맞은 셈이다. 미루씨는 나와 보스코가 먹을 보식 나물들을 만들고, 우리 두 사람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교습시키다 돌아갔다.

새해를 맞아 알프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빵기는 산골 숙소에서 와아파이가 되는 그 마을 시청 앞 광장까지 내려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화면상으로 새해 인사를 했다. 눈 덮인 알프스에서 두 강아지 시아와 시우, 우리 든든한 며느리와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현지 자정시간에 새해인사를 건네 온 작은아들의 목소리만으로도 든든히 맞은 새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