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맑음

그믐달이 전깃줄에 걸려 못 내려오고 있다. 애리씨가 비빔국수를 만들어 저 달그릇에 담아 먹었으면 좋겠단다.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다보니, 그 숱한 고아들을 입양하여 키우고 먹이고 보살피다 보니, 그니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들 먹이는 생각이 가득해서 뭘 봐도 연상되는 게 먹을 것이려니 하였다.

아침 6시 30분! 우리는 달빛 속에 어둠을 가르며 달려온 5번 버스를 탔다. 강정초등학교를 지나서 내렸다. 샛강의 물결은 아직 잠들어 있고 먼동에 이마를 드는 바다의 새벽은 붉다. 머지않아 태양이 떠오르면 그 따순 손길에는 ‘잠들지 못하는 섬’의 만물도 몸을 털고 부스스 잠깨어 일어나리라.

제주강정해군기지 공사장 입구, 평소 그 대형 트럭과 레미콘이 하루 종일 드나드는 자리에 매트를 겹쳐 깔고 자리를 잡았다. 강정 바다의 울음과 날마다 드릴에 뚫리고 부서져가는 구럼비의 비명과 지쳐도 지쳐도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이들의 염원을 모두 모아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100배의 절을 올렸다. 한 번의 절마다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무릎을 꿇고서 엎드려 절함은 이웃나라 이웃 종교 이웃의 가족을 모두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맘들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피조물을 짓밟아서는 안 되고 서로 위하고 욕심을 줄이고 가진 것 나누라는 기도, 그 마디마디가 내 모자란 삶을 돌아보게 만들면서 눈물짓게 하였다.

내 왼편의 정애씨는 단아하게 몸을 접어가며 기도하는데 오른쪽의 키다리 미국아저씨는 무릎 꿇기도 엎드려 절하기도 몹시도 서툴지만 그의 기원만은 참 거룩해 보였다. 자기네 국익 때문에 작은 나라의 권익을 사정없이 유린하는 미국의 잘못을 대신 빌려고 이역만리를 달려와서 거행하는 저 속죄의 몸가짐이 천지신명께 전해질 게다.

▲ 저 평화의 일꾼들은 열흘의 강정순례를 마치고 사정이 더 절박한 다른 나라를 찾아 떠난다.

한 시간 가까이 절을 올리고 강정공소 잔다크 회장님의 트럭을 얻어 타고 숙소로 돌아와서 ‘말’에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했다, ‘말엄마’와 외팔의 말없는 바리스트는 이미 우리와 한 식구 된 기분이 든다. 솜털뭉치나 밀걸레 비슷한 개는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경계심을 중단하였다. 이 집에 들어오면 사람도 짐승도 모두 동등한 생명체로 존중받으므로 경계심을 푼다. ‘말엄마’가 이룬 자그마한 세상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11시에 강주교님을 예방하기로 정해져 있어 벤을 불렀는데 부지런한 기사님이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하여 우리를 제주까지 태워다 주었으므로 먼저 공항에 가서 수화물 보관소에 짐들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중앙동 주교좌성당 곁 주교관으로 갔다.

강우일 주교님은 우리를 맞아 차를 대접하시면서 해군기지를 만들어 이 아름다운 땅이 산산이 부서지는데도 이념의 희생자로 숨죽여 살아온 섬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단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더라도 평화사목센터를 만들어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에 힘쓰겠다는 결심을 다짐하셨다.

함께 배석한 찬숙씨는 “이제 강정은 죽었구나!”라면서 절망하고 왔다가 그 질긴 투쟁의 현장을 보고 오히려 자기가 힘을 얻고 떠난다고, 정애씨도 “내가 서 있는데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돌아보았노라”고 심금을 털어놓았다. 애리씨는 딸의 친구와 함께 고생하는 현장의 젊은 여성들이 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수일 내로 이 현장에 돌아와 올 듯하다. 이렇게 주교님 앞에서 마음을 열어놓으면서 눈물짓는 얼굴에서 강정에 대한 사랑이 그니들의 영혼 전부를 흔들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45분의 면담을 마치고 주교님의 축복을 받고서 나와 중앙성당에 들러 잠시 기도하고, 아침의 밴아저씨를 다시 불러 공항까지 가 점심을 먹었다. 찬숙씨와 정애씨는 광주로, 나머지 넷은 김포로 향했다. 이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꼈는지! 보스코와 나는 숙제가 가득한 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오는 학생 같았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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