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40년 넘게 선교사로 일하셨던 미국인 이무열 목사님은 나를 소개할 때마다 <팔방미인>이란 한자어를 사용하셨다. 그 분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쓰시는 것을 잘 알기에 개의치 않았지만, 가끔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 말을 쓰면 그 속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전공도 아닌데 <괜히 이것저것 헤집고 다니는 놈>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TV에 나오는 목사님들 중에는 저 분이 <연예인>인가 싶은 분들이 많다. 이리저리 보면, 브로커, 이벤트 기획자(혹은 모사꾼), 선거꾼도 있고 건축 전문가, 음향 전문가, 시인, 민간의학자도 많으며 요즈음은 CEO도 많다.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은 본연의 직무에 아주 충실한 편이라 늘 다행이라 여긴다.

그러나 나는 간혹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천재들을 보면서 그저 압도되고 말 때가 있다. “그 치열한 삶을 살면서 어떻게 그 많고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자신의 전공과는 다른 영역에 저렇게 조예가 깊을 수 있을까? 저런 가르침을 위하여 얼마나 공부하고 생각했을까?”등의 감탄은 궁금함을 넘어 신비스러운 외경심까지 갖게 한다.

세종대왕이 그러하다. 왕으로서 정치와 법의 모범적인 기틀을 마련하기에도 무척 벅찼을 텐데, 직접 참여하고 진두지휘하여 방대하고 다양한 많은 책들을 편찬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하여서도 노심초사했다. 특히 그의 애민(愛民)정신은 한글창제로 진수에 이르렀다. 그렇게 완벽하고 아름답고 과학적인 글자를 직접 만드시어 지금껏 우리가 은덕(恩德)을 입고 있다. 집현전 학사들이나 둘째 따님인 정의공주가 돕기는 하였으나, 십중팔구는 건강까지 잃으시며 당신이 몸소 피땀을 채워 이루신 일이다.

세종대왕께서 위대한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잘 알려진 대로 <악학궤범>을 통해 박연 등과 함께 아악의 부흥, 악기 제작에 힘쓰셨을 뿐 아니라 지금껏 국악에서 쓰고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시기도 하였다. 정간보는 동양에서 가장 이른 유량(有量)악보이다.

▲ 악학궤범에 실린 정간보

또한 <정대업>, <보대평>, <발상>, <봉래의> 등의 대곡을 직접 작곡하셨다. 앞의 두 곡은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고, 요즘도 국립국악원에 의해 매년 연주되는 ‘여민락’은 <봉래의> 일곱 곡 중 두 번째 곡이다.
1997년, 오케켐의 서거 500주기와 슈베르트의 탄생 200돌, 브람스 서거 100주기를 맞아 우리 음악계가 떠들썩한 일에 대하여 “올해 탄생 600주년을 맞는 세종대왕 기념음악회는 없고 슈베르트, 브람스로는 난리냐?”며 성공회 지휘자인 홍준철 선생이 비꽈서 한탄한 일도 있었다.

▲ 오르간 연주하는 슈바이처

밀림의 성자라 일컫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종말론>의 신학자이며 <생명 경외>의 철학자로, 또한 <오지>의 의사로서 놀라운 삶을 꾸렸다. 원자폭탄 실험에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등, 그의 실천적 삶에 비해 1952년의 노벨 평화상은 오히려 초라하였다.

한편 그는 오르간 연주자로서 오르간 구조 개선을 위한 책도 썼고, 요한 세바스찬 바흐 연구서도 썼으며, 마누라와 함께 <바흐 오르간 작픔집>을 집대성하였다. 생뚱맞도록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마르틴 루터의 삶도 또한 그러하다. 종교개혁의 과제가 엄청난데도 저술의 양과 질이 우리를 압도시킨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12권의 루터선집도 대단한데, 막상 100권이 넘는 루터전집을 보면 그 경탄을 말로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도 인간이었으니 힘들고 두렵고 슬프고 아플 때도 잦았을 터인데, 그런 와중(渦中)에 성서 번역도 하고 회중찬송가도 만들어 불렀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다. 심지어 (믿거나 말거나) 크리스마스<트리>와 <볼링>이란 운동도 마르틴 루터가 시작했단다.

루터가 가사를 쓰거나 작곡을 한 찬송은 37개 정도로 여겨진다. 그 중에 최소한 5곡이 창작한 곡이며, 27곡이 종교개혁 초기인 1520-25년 사이에 쓰여졌다. <마음 깊은 곳, 당신께!>등 대표적인 그의 찬송 10곡이 루터선집 8권에 실려 있다. 나는 지원용 박사님과 함께 그 노래들의 번역 작업에 참여한 것을 늘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 때 그 노래들을 잘 불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 루터의 새로운 신학 정신을 적절히 표현하면서도 친근하게 불릴 수 있는 뛰어나 회중 찬송들임에 틀림없다.

루터 자신이 발표한 최초의 곡은 1523년 작 <우리의 새 노래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것(Ein neues Lied wir haben an, das watt Gott unsere Herre)>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루터교도임을 고백하였다가 화형 당해 죽은 브뤼셀의 아우구스티누스 수사 두 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루터가 1530년에 쓴 미완성 글 <음악을 위해(Peri tés mousikés)>를 보자.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음악을 저주하는 열심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악은 첫째 사람의 선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며, 둘째 영혼을 즐겁게 하며, 셋째 마귀를 몰아내고, 넷째 죄 없는 기쁨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분노ㆍ욕정ㆍ교만을 지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 다음의 맨 첫번째 자리를 음악에게 부여하는데 이는 다윗과 모든 선지자들의 예를 보아 얻은 결론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적을 시와 노래로 전했다. 다섯째 음악은 평화의 때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견뎌내라. 우리 이후에 오는 인간들은 이 예술과 함께 더욱 나아지리라. 나는 평화 속에 사는 바이에른 영주들을 칭송하는데, 이는 그들이 음악을 육성하기 때문이다. 우리 작센 영주들은 무기와 폭탄을 설교한다.”
 
루터가 회중찬송을 처음 부르게 했다지만, 물론 루터 이전에도 많은 독일어 찬송가들이 존재하였다. 이미 9세기 이전에 <키리에(Kyrie eleison & Christe eleison)> 같은 노래가 유행했고, 그 후 종교개혁 때까지 수백 곡의 종교곡들이 만들어져 축일이나 장례식, 순례 시, 또는 전투에 나아갈 때 불려지곤 했다. 14세기 이후에는 종교적인 시가 권주가나 연가의 곡조에 맞추어져 노래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규 미사 때는 독일어 찬송은 말할 것도 없고 평신도의 찬송 자체가 금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루터는 과감히 노래를 종교개혁 운동에 포함시켰다. 교회의 변화는 물론, 향후 서양 음악에 엄청나게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시 회중 찬송에 대한 수요가 워낙 컸으므로 코랄은 다음 세 가지의 방법이 쓰여졌다. 즉 예배에 쓰일 필요에 따라 시편 등의 적절한 가사가 다듬어져 작곡되어진 것이 첫 방법이었으며, 기존 가톨릭의 라틴ㆍ독일 성가들을 수집하여 수정ㆍ보완한 것이 둘째 방법이었다. 셋째 방법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세속적인 노래에 새로운 종교적 가사를 붙여 교회 음악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 예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새로이 창작된 코랄로서 첫째 방법의 예이며, 1523년 대림절에 불린 ‘구세주여 오시어’는 기존 찬송을 개작한 둘째 방법의 작품이다.

사순절 찬송 <오 거룩하신 주님>은 세속곡에 가사를 바꿔 넣은 셋째 방법을 사용한 코랄이다. 본래 이 곡은 남녀지간,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하슬러의 1601년 작품인데 코랄로 개정되어, 100여 년이 지나 바흐에게 와서 <마태수난곡> 등에서 가장 주요한 테마 곡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듯 기존 선율에 영적 의미를 부여한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형식을 <콘트라팍툼>이라고 하는데, 친근하고 쉬운 회중 찬송을 만드는 방법으로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다. 지금 우리의 찬송가에도 이러한 형태의 찬송들이 다수 포함되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때가 차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처럼, 봇물 터지듯 새로운 찬송가인 복음적 코랄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루터는 주로 1520년부터 25년 사이에 많은 찬송을 만들었는데,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한국교회가 알고 있는 유일한 루터의 찬송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사제라는 그의 지론이 회중 찬송을 낳게 되고 그에 따른 관심과 노력은 찬송가의 원형인 <코랄>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것이다.

▲ 코랄_내 주는 강한성

새롭게 만들어진 <코랄>은 모든 성도들이 노래도 부르고, 가사를 통해 말씀도 새기며 주님의 은총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전통을 존중하던 루터는 가톨릭의 <찬트>를 없애지 않았다. 오히려 개선된 찬트(미사)를 완성하였다. 오히려 신도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회중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찬트를 개발하여 예배 시간에 함께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의 당면한 과제였다.

물론 이 모든 예배 음악이 모국어로서 불리어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1523년에 우선 비텐베르크 교회의 라틴어 미사를 복음적으로 개정하였고 1526년에는 루터 독트린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요한 발터와 콘라드 루프쉬가 루터의 격려에 힘입어 독일어 미사를 만들었으며, 1562년에는 독일어의 억양과 묘미를 잘 살린 ‘독일어 미사’가 출판된다. 가톨릭의 자국어 미사 인정은 이로부터 400여 년 뒤(2차 바티칸공의회 1962-65)에나 이루어지게 된다.

앞에서 거명한 요한 발터(Johann Walter, 1496-1570)는 작곡가이며 시인으로서 루터의 음악적 조력자였다. 그는 새로운 복음적 운동을 위하여 라틴어 모테트 5곡과 독일어 코랄 38곡을 묶어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찬송집 ‘교회 노래 모음’을 1524년에 출간했고 1551년 5판 때까지 계속 보강했다. 그는 1526년 토르가우 라틴어학교의 칸토르(교회음악장)가 되어, <같이 부르는 음악>에 힘을 쏟았다.

바흐에 앞서 오래 전에 라이프찌히 성 토마스교회에서 봉직하던 게오르크 라우(Georg Rhau, 1488-1548)는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추종자가 되어 비텐베르크로 와 음악가이며 인쇄인으로서 1544년 여러 작가가 쓴 123곡의 다성코랄과 모테트가 실린 보다 중요한 찬미가집을 간행하여 루터교 코랄이 전파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신 독일교회성가’라는 제목의 이 책에는 당대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인 루트비히 젠플(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루터와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토머스 슈톨처, 베네딕투스 두치스, 식스투수 디트리히, 아놀트 폰 부르크, 루푸스 헬링크와 편집자 자신의 작품이 교회절기에 맞춰 포함되어져 있다.  이렇게 하여 종교개혁 초기에 작곡된 많은 코랄들이 왕성하게 불려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찬송 운동은 루터파 교회가 이룩한 음악적 공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중요한 것이었다. 장로교ㆍ감리교의 영향이 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영·미 찬송이 주류를 이루지만, 외국 찬송가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루터교회의 코랄로 채워져 있다. 개편찬송가에 40곡 정도 있었는데, 점점 줄어 새찬송가에는 열댓 곡 남았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한 사람의 건강한 생각은 세상과 역사를 변화시킨다. 음악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예배와 서양음악은 분명히 루터를 통해 크게 고양되고 발전하였다는 것이 뚜렷한 역사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렇게 시작된 코랄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자.

필자소개     ▲ 주대범 장로 1955년 서울에서 출생, 교육에 종사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개인적으론 작곡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10년 한 후, 출판사를 운영 했었다. 교회합창곡도 작곡하고, 글도 쓰면서 누가 부탁하면 목수 일도 하고, 시각디자인도 한다.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생활을 39년째 하고 있다.

주대범 장로 (중앙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  bawee1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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