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나이가 어느 정도 될 때까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젊었을 때는 은혜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다. 그것은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한 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로 여겼기 때문이다. 뚜렷한 목표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준한 행동을 착실하게 이행하면 될 것을 여기에 왜 은혜가 필요한가, 반문하는 입장이었다. 나에게 은혜는 부정적이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친근감을 주는 용어가 있다. “개 팔자”이다. 나는 집안에서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종종 들으며 자랐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주어지는 개 팔자를 뜻하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을 때도 나는 개띠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했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 팔자가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감지하게 되었다.
 

내 자신이 죽자 살자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일이 잘 풀리는 그런 것들이다. 독일로 유학 갈 때에 마침 그때 외삼촌이 그곳에 계셔서 쉽게 학업을 시작할 수 있었고, 함부르크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것도 마침 선임자이셨던 고향 선배님이 계셔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독일 유학을 마치게 된 것도 목회하면서 함께 일했던 독일교회 기관의 동역자들이 장학금과 생활비를 마련해 주어서였다. 연세대에 오게 된 것도 목회하는 동안 우리 집의 손님으로 오셨던 분들이 주선하여 주셨다. 큰 노력 없이 행운이 굴러 들어온 격이다. 내가 ‘개팔자’ 임에는 틀림없다. 돌이켜 보면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한 ‘하느님의 은혜’로 생각한다.
 

낚시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하늘이 주셔야 고기를 잡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아는 지식과 경험을 다 동원하였지만 허탕을 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어제는 이 포인트에서 대박이 터졌다고 하는데 오늘은 잡어 새끼 하나 없는 꽝인 경우가 흔하다. 자연조건은 어제와 오늘이 별 차이가 없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불가사이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낚시는 은혜의 영역이다.”라고 말한다. 고기는 하늘에서 주셔야 잡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가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손님 대접하기 위해 주로 그 전날 -기상조건이 나쁘면 그 전전날부터- 낚시하러 나간다. 싱싱한 자연산 생선을 직접 잡아 접대하고 싶어서이다. 출조 하기 전야는 매우 바빠진다. 밤 1시나 2시에 출항하기 때문에 모든 준비(채비 및 미끼, 식사준비 등)는 그 전날 저녁에 끝내야 1, 2시간 눈 부치고 집을 떠날 수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낚시를 하게 되면, 밤낚시를 시작으로 새벽 물때를 보고 한 번 낚시하고, 점심 전후의 물돌이 때를 한 번 더 보고 귀항하게 된다.
 

낚시하는 동안 낚시꾼은 쉼 없이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목표어종을 낚기 위한 잔머리이다. 물때는 몇 물인가, 들물인가 날물인가, 조류의 방향과 세기는 어떠한가, 이에 따라 고부력 찌를 사용할 것인가 저부력 찌를 사용할 것인가, 수심은 얼마나 되며 이에 따라 원줄과 목줄 길이는 얼마큼 줄 것인가, 밑밥은 어디에 어떻게 투여할 것인가 등등 쉼 없는 머리굴리기 운동은 낚시하는 동안 계속된다. 이것은 낚시꾼이 고기 잡을 확률을 최대로 높이기 위한 노력들이다.

▲ 필자가 고흥 나로도에서 갯바위 낚시하다 휴면서 찍은 것이 됩니다.

어쩌다 고기떼를 만나 줄줄이 낚이는 ‘줄낚’을 제외하고는 대개 낱마리로 잡힌다. 가끔 예상치 않은 대물이 물려 힘겨루기를 할 때는 정말 신나는 날이다. 그러나 대물(大物)을 잡는다는 보장은 없다. 낚싯바늘이 제대로 물리지 않았든가 혹은 원줄 내지 목줄이 대물과 힘겨루기에 약하다든가, 낚싯대나 릴이 상대적으로 작다든가 하면 여지없이 터지고 만다. 다 걸어 올린 고기를 마지막 단계에서 치고 박는 고기의 힘에 밀려 터질 때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이다. 고기가 낚여 손에 쥐어질 때까지 그 긴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대물을 걸어 올렸을 때, 그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쁘다. 자신의 낚시 실력을 내세우기에 앞서 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온다.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낚시에 있어서도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다. 지금(10월)은 봄철에 산란한 고기들이 성장하여 깊은 바다로 이동하는 계절이다. 특히 남해의 고급어종 중 하나인 감성돔은 25-30cm 정도로 크게 자라 먹을 만하게 씨알이 굵어졌고 손맛도 괜찮다. 감성돔 지리국과 소금구이는 정말 맛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고기가 있을까 감탄할 정도다. 나는 감성돔을 먹을 때마다 이런 맛있는 고기를 우리 인간에게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가끔 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낚시꾼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기쁨은 혼자 간직할 수가 없다. 이 복음을 격양된 목소리로 외쳐야 직성이 풀리고, 주변의 벗들을 불러 기쁨을 나누어야 맘에 평화를 누린다. 이김에 벗들에게 하고 싶은 것은 초대받아 올 때는 소주 한 두병은 가지고 와 달라는 부탁이다. 낚시꾼은 낚시하느라 밤잠 못자며 온종일 중노동하고, 접대하느라 생선 비늘치고 포 뜨고, 냉장고에 숙성시키고, 지리국 끓인다. 그러나 손님들은 배불리 먹고 늦은 밤까지 신나게 수다 떨며 놀다가 떠나간다. 부엌에 남는 것은 수북하게 쌓인 설거지 거리들이다. 그 밤중에 그 피곤한 몸으로 혼자 뒤처리할 때는 심란하고 착잡한 심정이 될 때가 있다. 벗들이여, ‘손님으로 오지 말고, 낚시꾼의 기쁨에 동참하는 벗이 되어 달라’고 권하고 싶다.
 

어복이 터지든가 대물(大物)이 낚인 날, 손님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이분들은 은혜가 풍성하신 이들이다. 내가 낚시를 잘 해서가 아니라, 위에 계신 분이 풍성하게 주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개팔자 인생이 되던 은혜로 사는 자가 되던, 낚시를 해 봐라! 낚시는 은혜가 뭔가를 더욱 선명하게 깨우쳐 준다. 낚시는 우리가 위에 계신 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체험케 한다.

▲ 삼부도 갯바위에서 찍은 사진으로서 멀리 보이는 섬은 거문도이다. 원도권 바다가 호수같이 고요하다.

2014년 10월 22일
고흥반도 해변의 시골집에서

박명철(전 연세대교수)  mcpar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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