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혼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아니 요즘은 가끔이 아니라 대부분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닌다. 이유야 둘러 댈라고 치면 백가지도 더 댈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이 갈 여자 친구 하나 없다는 것이다.

잘 나가는 한국 영화들은 민족주의 영화다?

하여간 지난 주말에도 변함없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돌아오는 길에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결국 타고 오던 차의 진로를 돌려 극장가로 향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요즘 잘 나가는 영화 중의 하나인 「웰컴 투 동막골」을 보기 위해서였다. 보고 난 느낌, 아주 재미있는 영화였다. 영화 내내 웃다가 눈물도 찔끔 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잘 만들었다고 박수도 쳐주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혼자서 박수도 쳤다. 그러나 왠지 찝찝한 기분은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 이것도 단 하나! 요 몇 년 사이의 한국 영화 중에서 잘 나간다고 하는 영화들이 거의 모두가 민족주의라는 담론을 깔고 있다는 야릇한 생각에서이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 성이 강한 글이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바로 뒤로가기를 눌러서 나가시기를 바란다.

동막골은 이상적 대한민국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처럼 막 살라고” 이름 붙여진 동네, 동막골에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남측 군인 둘, 북측 군인 셋, 연합군의 미군 전투비행기 조종사 하나가 불시착해서 흘러들어오게 된다. 시간적으로 조금 일찍 들어오게 된 미군 조종사는 말이 통하지 않음에 미치고 환장하려고 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들어오게 된 남측과 북측 군인들은 만나는 첫 장면부터 서로 잡아먹지 못해 총부리를 겨눈다. 동네 촌장님의 집 마당에서 총부리를 겨누게 된 상황에서 동네 주민들은 마당에 있는 평상에 모두가 올라가 손을 들고 있고 군인들은 대치 상황을 며칠간 계속하게 된다.

▲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군인들 사이에서 고생하는 애꿎은 동막골 주민들

이 장면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겠지만 잘 보면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주민들이 그려진다. 애꿎게 어디서 굴러들어 온 군인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통에 총이 뭔지도, 전쟁이 일어 난지도, 왜 그런 전쟁을 벌여야 하는지도 모르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동네 주민들만 가운데 평상에 끼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보여준다. 정말 이데올로기는 쓸데 하나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게 며칠을 서로 대치하가다 북측 군인이 뽑아든 수류탄이 결국 촌장님의 곡식 간에 떨어지게 되고 겨울 양식을 위해 거두었던 옥수수가 폭발하면서 팝콘 비가 내리는 장면은 포복절도할 장면이다. It's raining Man도 아니고 It's raining Popcorn이다. 이렇게 동네 주민들이 먹어야 할 양식과 곡간을 날렸다는 죄책감에 이들은 곡식 거두는 것을 돕게 된다. 서로 간에 적대감은 거두지 않은 채 말이다.

▲ 팝콘 비가 내려요

그런데 기가 막힐 장면이 하나 연출되는데 바로 그들이 입고 있던 군복을 벗어버리고 동네 주민들과 같이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곡식 거두러 가는 것이다. 속으로 아니 내 손으로 무릎을 쳤다. 이제 저 군인들에게 이데올로기보다는 삶이 먼저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라는 것이다. 아니 정치적 이데올로기가가 아니라 삶이라는 이데올로기, 그 삶을 지탱해 주는 공간인 동막골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입었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입고

동막골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동막골이라는 동네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동막골은 누가 봐도 한국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동네 주민들은 모조리 흰 옷 입고 등장한다. 흰 옷 입었다고 한국을 각인시키는 장치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난 동네 촌장님 보면서 왜 자꾸 단군 할아버지만 오버랩 되는지??? 바로 내가 영화가 가지고 있는 담론이 민족주의라는 의구심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동막골이 가지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다.

▲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벗고 삶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입은 군인들

이렇게 동막골 삶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북측도 남측도 서로에게 적이 아니라 한 민족임을 구구절절한 장면들을 통해 보여준다. 삶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한국군이나 연합군은 전쟁에서의 승리밖에 모르는 냉혈한으로 그리면서 말이다. 동막골이 적의 진지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승리를 위해서는 부수고 봐야한다는 무식한 연합군의 대사에서는 분기탱천하는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한다. 또 한 가지 북측 군 장교의 입에서 6.25는 남침이었다는 목소리는 전쟁을 겪은 남한의 모든 분들에게 이제껏 얽혀있던 앙금들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게 보였다. 아니 북측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 주기에 넉넉했다.

그러나 한 가지,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강혜정 씨가 맡은 '여일'이라는 인물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 북측 군인과 마주쳤을 때, 그녀를 규정하기 위해 나왔던 대사가 “머리에 꽃 꽂았어요!”라는 뒤로 넘어갈 만한 대사였다. 내가 보기에는 미친 것이 아니라 순수 그 자체였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는 건데, 제국에게 희생당한 우리 누이들의 넋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몸을 팔수밖에 없었던 기지촌의 우리 누이들, 지나가는 장갑차에 영문도 모르고 짓밟혀야 했던 생떼 같은 우리 동생들, 이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 역할은 정말 감독한테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 순박한 처녀 여일

하여간 이렇게 삶이라는 질퍽함 속에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그저 더러워지면 빨기 위해 벗어버릴 수 있는 옷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잊혀지고,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대립해 있어야 할 존재에서 서로 기대고 있어야 존재들로 승화되어 간다. 서로의 상처도 아물어가면서 말이다. 지아비가 없고 아버지가 없는 모자에게 북측 군인이라는 것은 전혀 장애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봐야만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저 삶이라는 공간에서는 문제도 아닌 것이다.

이런 행복도 잠시! 연합군의 폭격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군 조종사를 구하기도 할 겸, 동막골이 적의 진지인지도 확인할 겸 부대가 파견된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장면들이 줄을 잇는다. “우리가 연합군이지” 하는 극에 달하는 대사까지 이어지면서 말이다.

이젠 민족주의 시대인가보다, 그러나...

이런데도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까나? 아니 어쩌면 이렇게 영화를 보는 내가 철저한 반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상야릇한 놈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 민족주의가 뭐가 나쁘냐? 우리 끼리 잘 살아보자는데 말이다. 참 이 말 예전에는 소위 NL 진영의 운동권에서 쓰이던 말인데, 이번 8.15 행사 포스터에 떡 하니 쓰여져 있는 것을 보니 세월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정부 기관에서 말이다...ㅋㅋㅋ

그래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한 번도 힘을 얻은 적이 없었다. 김 구, 장준하 선생님처럼 민족주의자가 빨갱이로 몰려 죽음을 당한 비운의 역사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한 번쯤은 분위기 탈 수 있도록 밀어줄 수도 있을 사안이 아닌가?

그러나 또 한 줄기의 역사는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아니라 문제투성이의 민족주의 때문에 겪어야 했던 질곡의 세월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민족주의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사실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녹차의 꿈  schottroff@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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