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년 전 정년퇴임을 하고 전남 고흥지방에 내려와 살고 있다. 삼모작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위해서다. 인생을 낳고 성장하여 자립하기 전까지의 인생을 1모작이라 한다면, 부모의 집에서 출가하여 독립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시기를 2모작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정년퇴임을 시점으로 지금까지 해 오던 모든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노년기의 인생을 3모작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젊어서 노력하여 쌓아 놓은 그 모든 것을 접는다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고 마감할 것인가의 과제는 더욱 주요했다.

▲ 필자가 살고 있는 집의 전경. (사진: 박명철 교수)

나의 인생주기를 셈해 본다면, 제주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지내고 서울로 상경하여 학창시절을 보낸 후 독일로 유학 떠나기까지의 30년, 이것이 나에겐 1모작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직장(목회)생활을 하며 지낸 18년과 귀국 후 연세대에서 일한 18년의 세월은 나의 인생 2모작 기간이다. 그러다 보니 벌써 정년퇴임하는 시기를 맞았다. 앞으로 사는 날까지 나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포부는 내게 있어서 그 어느 때 보다 강렬하다. 이것이 과거를 옛것으로 여기고 새일에 매진하게 한다.

3모작 인생을 설계하며 기본적으로 고려해 본 것이 있다. 첫째는 어디서 살 것인가, 둘째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셋째는 어떤 생활수준(Lebensniveau)을 유지할 것인가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전남 고흥까지 내려온 것은 그 첫 번째 이유에서이다. 내가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간 동안은 시골에서 살자.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나이가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두 번째 질문,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이것은 무엇보다 주요하다. 나의 생활모토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자.’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재미도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여기에서 고려되는 것이 취미생활이다. 나의 취미는 낚시이다. 이런 이유에서 시골이지만 산을 택하지 않고 바다를 택했다. 세 번째 질문은 경제적 생활수준인데, 참으로 힘든 과제 중 하나다. 나는 교육공무원 20년을 채우지 못해 연금을 탈 수가 없다. 퇴직금과 (부어놓은) 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이것으로 노년을 설계하고 시골생활을 계획해야 했다. 살 집은 시골집을 개조하여 사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취미생활도 생활낚시를 위주로 즐겨야 한다. 시골생활은 도시에 비해 생활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품위유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옛날의 ‘영예’, 소위 ‘대학교수’라는 품위 및 경제적 여유는 잊고 살아야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지금 나의 명함에는 “연세대 퇴임교수, 현재 강태공”으로 되어 있다.

현재 나의 생활에 대한 주변의 기대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시골에 살다보니 주거생활과 환경문제로 동네 반장이나 면사무소 직원을 만나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하는 말, “교수님, 강태공이 뭡니까? 연세대교수님께서 ... ” 이들의 눈에는 내 형편이 안쓰러워 보이는 모양이다. 내 아들이 아빠 사는 곳이기에 와 봐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찾아 왔다가 돌아가면서 하는 말, “아빠, 이곳 보다는 조금 더 문명화된 곳이면 좋겠어!” 하고 떠난다. 그가 살기에는 불편하다는 말이 되겠다. 종종 방문하는 손님들이 있는데, 이들은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찾는다. ‘별장’으로 알고 왔다간 실망한다. 서울과 너무 멀다고 투덜댄다. 모기 때문 못 살겠다며 서둘러 귀가한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러나 내가 좋은 걸 어떨 건가. 사는 것은 나인데. 이런 생각으로 자위하며 살고 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과 거리가 멀다. 약 400km가 되니 5-6시간은 달려야 서울집에 갈 수 있다. 서울-고흥 간 직행고속버스로는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거리가 먼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일정이 바쁘신 분들은 시간 내서 찾아 오기가 힘들다. 그러나 여유를 가지고 오시는 분들은 하룻밤을 묵으면서(아니, 이틀 밤이라도 좋다) 신선한 생선회와 생선국을 들이키며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오랜만에 우리 사이에 옛 정과 우정, 낭만이 찾아 든다. 잃어버린 것을 돼 찾은 기분이다.

퇴직 후 나의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질문이 있다. 소위 ‘신앙 좋다’는 분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은퇴 후 무엇을 하십니까?”
 “전라남도 고흥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목회를 하십니까?”
 “아니요. 그곳에서 낚시하고, 텃밭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매우 냉담하다.
 “목사님, 그러시면 됩니까? 성경에도 ‘죽기까지 충성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 선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창조주는 내가 정년퇴임 후에도 일하다 죽는 것을 보시고 ‘참 잘 했다’ 칭찬하고 즐거워하실 분일까? 아니면,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실 분일까? 나는 창조주 하느님의 의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는 연속되는 일에서 벗어나 ‘안식’을 취하고, 이날을 성별하여 축복하신 분이 아닌가?

정년퇴임 후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나는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기에 하루하루가 재미있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나의 인생’이 있기에 그 자체로 행복하다.

2014년 8월 9일
고흥반도 해변의 시골집에서

박명철(전 연세대 교수)  mcpar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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