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6, 오베르 쉬르와즈, 캔버스에 유채, 56×67cm, 개인소장)

빈센트는 파리 동생의 집에 온 지 사흘 되던 1890년 5월 20일, 파리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로 떠났다. 그곳은 조용한 시골이면서도 파리와 가깝다는 이점 때문에 세잔과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였다. 빈센트는 마을에 있는 라부 여인숙의 작은 다락방을 얻었다. 몸에 배인 규칙적인 생활은 창작 의욕을 돋우었다.

이 무렵 그를 돌보아준 의사가 폴 가셰다. 아내와 사별하고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던 정신과 의사인 가셰를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1830~1903)가 테오에게 추천하였다. 그는 의사였지만 그림도 간간이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였고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자연히 두 사람은 친밀해졌다. 빈센트는 가셰 박사에게 자신의 병을 내보였고 가셰는 빈센트에게 예술의 안목을 익혔다.

빈센트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두 점 그렸다. <가셰 박사의 초상화>에는 가죽 모자를 쓰고 몸을 비스듬히 한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손은 탁자에 올린 가셰 박사의 표정이 썩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눈은 우수에 잠겨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 때 의무장교로 참전했을 때 입었던 군복이다.

탁자에는 노란색의 두 권의 책이 있는데 공쿠르 형제가 쓴 <마네트 살로몽>과 <제르미니 라세르퇴>(1865)다. 이 책들의 주제는 프랑스 당대의 예술과 프랑스 하층민 여성의 정신질환 문제를 다룬다.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다. 이는 가셰 박사의 독서가 아니다. 사실 이 책의 주인은 빈센트다. 그는 책을 읽지 않거나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초상화 속 인물 표정이 유쾌해 보이지 않지만 가셰 박사는 이 그림을 소중히 여겼다. 마치 자신의 정신세계와 내면의 모습을 빈센트에게 들킨 듯한 기분이었을까? 때로는 자신의 내면이 상대에게 드러나는 일이 즐거운 경우가 있다. 우정이 두터울수록 그렇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진정한 친구란 서로의 내면을 읽을 줄 아는 법이다. 진심을 읽는 눈이야말로 우정의 밑절미다.

훗날 이 그림은 나치스에 의해 퇴폐미술로 분류되어 소각 위기를 겪기도 하였고, 1990년에는 미술 역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팔리기도 하였다.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던 빈센트가 드디어 미술사를 평정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빈센트와 가셰 박사가 이런 소식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하다.

삶이란 당대에 결과를 보아야 하는 속전속결이 아니다. 경박하고 천한 이들이 잔기술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기술로 살지 말고 예술로 살아야겠다. 찰나를 살지 말고 영원을 살아야겠다.

최광열(기독교미술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