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우 충남대 교수

나에게 적은 누구인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에서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런데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류 전체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개개의 인간, 즉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개개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감퇴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공상 속에서 곧잘 인류에 대한 봉사에 대하여 지극히 정열적인 생각을 품어 보기도 [하지만] … 그러면서 나는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단 이틀도 한 방에서 같이 지낼 수가 없다”라는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농담을 건넨다.

이는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쉽게 말하지만 정작 내 옆에 있는 한 사람도 사랑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경험하곤 한다. 관념적인 인류애가 아닌 내 옆에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개인의 영역뿐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국가들은 세계평화와 인류의 공영을 위한다는 이유로 다양한 국제기구를 창설하고 공존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국가들은 이웃국가들과 평화하기 보다는 싸우고 경쟁하곤 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는 사랑스러운 이웃이기 보다는 함께 할 수 없는 적으로 혹은 가장 두려운 존재로 남아 있곤 하다.

예컨대, 하나의 나라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경쟁적으로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벌이면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고, 독일과 프랑스도 19세기 이래로 한 세기 반 동안 무려 네 차례나 전쟁을 치렀을 만큼 치열한 대립 관계가 깊다.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한국과 일본 간에 불행한 역사적인 기억은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되고 있다.

한일관계와 가까운 이웃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는 국가형성기에는 적이기 보다는 가까운 이웃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663년 백제·왜 연합군과 당·신라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백강전투(중국에서는 백강구전투로, 일본에서는 백촌강전투)에서 찾을 수 있다. 7세기 한반도에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처음으로 맞붙은 국제전으로 알려진 백강전투는 우리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회자하지는 않는다. 백강전투에서 당시 백제 부흥군의 규모는 5000명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은 5~8배 이상인 2만 7000~4만 2000명이었다. 다른 의도가 없다면 일본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위해 엄청난 출혈을 감행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일본 연합군은 결국 신라군 5만과 당군 13만의 대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 전투에 대해 중국 당(唐)나라의 역사서 중 하나인 ‘구당서(舊唐書)’에는 “왜군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워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은 왜군의 시체로 핏빛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가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일본은 왜군 수군의 배 1,000여 척과 명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5만여명에 가까운 군대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백제와 일본의 친밀한 관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종종 잊히고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박노자 교수는 “약 4만 2000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우리의 이해는 확대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mDNA를 분석하여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된 유전자를 찾는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일본인은 단지 4.8%의 일본인 자체의 유전자를 가졌고, 나머지는 다른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25.8%는 중국(대륙)의 유전자를, 그리고 24.2%는 한국(반도) 유전자를 가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인들은 50% 이상 중국계/한국계 유전자를 가졌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인의 경우 한국인의 유전자는 40.6%를 가졌고, 중국(대륙)의 유전자가 21.9%를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하면, mDNA 유형을 살펴보면, 일본인과 한국인은 거의 유사한 mDNA 유형을 하고 있고 아마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본 국립 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에 수렴한다고 하기도 했다.

이는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 지도상으로는 한일 간의 관계는 제럴드 다이아몬드가 말한 바대로 쌍둥이처럼 유전자를 공유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 청산되지 않는 역사를 남겨둔채 화해를 운운하는 건 옳지 않다. ⓒGetty Images

한일관계에서 적의의 근원

하지만, 한일관계는 평화와 협력보다는 적의로 가득 차 있다. 한일관계의 적의의 배경은 역사적인 상이한 기억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먼저 깊은 적의의 원인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들 수 있다. 일본은 서양의 아시아 진출 시기에 즈음해 16세기 후반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등이 유럽에서 무역을 위해 온 이들을 통해 조총(鳥銃) 등 새로운 무기를 받아들여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군대는 15년 뒤 임진왜란(일본에서는 일본연호에 맞춰서 '문록/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으로 불림)을 일으킨다.

한국이 가진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본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미미즈카(耳塚)라고 불리는 귀 무덤이다. 임진왜란 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게 조선인들을 보이는 대로 사살해서 “적의 목” 곧 조선인의 목을 모아오라는 명령을 한다. 그런데 머리를 통째로 운반하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기에, 일본군은 그 대신 전리품처럼 희생자들의 귀와 코를 모아서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이에 일본군은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민중들을 죽이고 귀와 코를 베어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렇게 모아진 조선인들의 귀와 코는 일본 전역을 자랑스레 순회한 뒤 교토에 묻히게 되는데, 지금도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에는 이때 베어간 조선인들의 코 무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코 무덤은 처음에는 ‘귀 무덤’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에도시대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 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 무덤’이라고 하자 하여 귀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코무덤이라고 해야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대상이 귀(耳)이건 코(鼻)이건 간에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목적과 과정과 상관없이 일본의 야만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이후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역사적인 기억이 되었다.

극단적 적의와 트라우마의 배경

특별히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적의의 배경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35년간의 일본의 식민지배는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별히 조선 식민지배가 시작된 무단통치기에 일본은 문명화되지 못했다고 꼬리표를 붙인 조선인에 대해 공개적 태형령(笞刑令)을 내리며 법치의 이름으로 야만적인 폭력이 자행했고, 3.1 독립운동으로 저항하여 변화한 문화통치 기간에는 검열을 통해서 사상의 통제를 가했다. 식민지 말기 전시체제 속에서는 국가 총동원법이라는 이름으로 인적, 물자 등을 수탈하면서 강제동원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유선영은 일제 식민지 시기를 “지배민족과 피지배 민족이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재배치되어야 유지되는 체계로, 이 기본적인 사회관계 안에서 민족적 모욕과 수치, 폭력, 굴욕 또한 일상화”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피식민의 결과로 조선인들은 후진성(야만)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져 업수이 여김을 초래하였고, 조선인으로서 업수이 여김을 당하면서도 반항도 분노도 하지 못했던 분노와 울분은 한국인의 역사적인 기억 속에 트라우마로 깊이 남았다.

한국에서 ‘적의 계보학’을 그리다

한국에서 적의 계보학을 논의할 때 일본이라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빼놓고 논의할 수 없다. “집단기억”은 특정 공동체의 공통된 과거에 대한 공유된 기억과 표상을 나타낸다. 한일관계에서 상이한 집단기억은 역사이해에 대한 차이로 귀결되었다. 대결이 아닌 공존과 소통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과거대로 직시하고, 이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적이 아닌 파트너로서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자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럽연합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유럽연합의 두 맹주인 프랑스와 독일이 대결과 복수의 상징이었던 콩피에뉴 숲에 있는 열차를 화해와 회복의 상징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일관계에서 “콩피에뉴 숲에 있는 열차”와 같은 그 평화와 화해의 열차는 무엇일까?

강성우(충남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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