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농두레 – 손모내기 ⓒ유대은

나는 농부다

전라도 자응(장흥을 여기에서 자응이라고 발음한다.)에서 농사짓는 농부다. 농촌에서 목회하고 싶어 대학원 시절부터 농촌교회의 부교역자로 있었다. 농가의 손자로 자라 농촌의 삶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본격적인 농사는 부교역자 사임 후 귀농해서 시작했다.

대안장터의 장꾼으로 일했던 아내의 덕에 귀농과 귀농지의 결정은 어렵지 않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게 어느덧 8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농부로 살고 있지만 아직도 농부가 되어가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농부가 뭐여?

어느 날 이장님께서 마을방송으로 농업경영체 갱신과 관련해서 마을의 경영체 있는 분들의 명단을 쭉 불러주신 적이 있다. 마을의 가구 수의 3분 1도 안 되었다. 의아했다. 몇 집 빼고는 다들 농사짓는 것 알고 있는데 막상 행정상 인정하고 있는 농업가구 수는 반도 안 된다니 충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농사는 짓지만 행정상의 농업인으로 등록될 상황만 안 될 뿐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는 짓지만 300평 이상의 농지 소유나 임대차만 안되어 있을 뿐이지, 벌초나 산을 대신 가꿔주면서 해당 문중의 땅이나 농지를 경작하거나 마을공유지에서 농사짓는 분들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행정상 인정은 안되지만 농사짓는 농부가 많이 있다.

농사짓는 것을 뭘까. 농부는 뭘까. 농지의 소유나 농업소득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절기에 따라 먹을 거리를 심고 거두는 것 뿐 아니라 자연이 내어주는 고사리, 참나물 같은 나물들을 뜯고 개복숭아 열매를 따다 담그는 것도 농부들이 하는 일들이다.

자기 먹을 거리를 깻잎 한 장이라도 길러먹는다면 농부라고 하고 싶다. 시골에서 수십마지기 농사하는 사람도 도시에서 조그마한 옥상텃밭 하는 사람도 모두 농부다. 다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농사방식과 종자가 달라지기도 한다.

▲ 어린이 논학교 – 볏덕걸이 ⓒ유대은

나는 8번째 농사를 짓고 있는 초보농사꾼이다

농사짓기 전 ‘귀농통문’이라는 계간지에서 읽은 이야기가 있다. 50여년 벼농사를 지으신 분에게 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갔다. 귀농하신 분들을 위해 벼농사의 노하우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기자의 말에 농부할아버지는 “벼농사 50번밖에 안지어 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하며 손사래를 치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는 8년차 농부가 아니라 8번째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일 뿐이고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농사꾼인 것이다.

나는 농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무슨 농사 짓냐고 많이 물어본다. 대부분 원하는 대답으로 딸기농사, 수박농사 같은 특정 품목을 이야기 할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나는 나와 가족들이 먹을 거 길러 먹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부분 약간 뭔가 부족한듯한 느낌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러다 벼농사도 지어요. 하면 그제서야 농부로 인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로 많이 물어보는 질문은 “몇 평이나 지어요?”라며 농사의 규모를 물어본다. 그럼 나는 ‘손으로 할 만큼 해요.’라며 말하며 경운기도 있고 예초기도 있어요 gk고 웃으며 넌지시 흘리며 말한다. 사람들의 질문 속에는 원하는 대답이 이미 숨어 있어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농사라는 건 본디 하늘이 내어 준 만큼 지을 수 밖에 없기에 순리에 따르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농사를 모르는 이들에겐 농사가 농업이기에 소유와 자본의 가치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농사와 농업은 엄연히 다르다. 농업은 산업적인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농사는 인간 본연의 먹거리를 길러내는 활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농사꾼이다.

6월의 끝자락 농사꾼은 무척 바쁘다

논에 물을 잡기 위해선 비가와야 하지만 밀, 보리 같은 맥류를 걷어들이고 건조하고 감자를 캐려면 비가 오면 안되기에 날씨에 따라 몸이 움직여야 한다. 마늘, 양파도 뽑아 갈무리하고 추수가 끝난 곳엔 고구마, 깨, 콩을 위한 두둑을 만들고 씨와 순을 넣는다. 그 사이 손모내기도 한다. 그렇게 한바탕 6월이 끝나면 몸이 아플 정도로 몸이 처진다. 그래도 논과 들녘을 보며 뿌듯해 하는 게 농부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벼농사를 시작할 때 쯤 항상 읽는 책이 있다. 나에겐 교본 같은 책이다. 몇 년을 수십번 훑어보았지만 올 해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다. 책의 저자인 강대인 선생님이 평화(平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화의 화자는 벼 화(禾) 자에 입 구(口)자가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평화라는 것은 모두가 동등하게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평화는 남북간의 관계나 화합의 의미만 있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 평화는 농사이야기였다. 흔히 힘든 일이 있으면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냐는 말도 하잖는가. 모두의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게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일은 식량을 짓는 농사다라는 것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래서 나는 모두의 입에 좋은 밥이 들어갈 수 있는 평화를 짓고 싶다. 그게 농부의 일이다. 학생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도, 아이들과 손과 발로 토종벼농사를 짓는 어린이 논학교도, 작은 손바닥만한 텃논을 만들어 모를 내는 것도 평화를 짓는 일이다. 그래서 지역에서 함께 벼농사 품앗이 하는 소농두레 식구들은 이를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사회’라고 이야기 한다.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사회를 꿈꾸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래요?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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