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sus Teaching: The Sermon on the Mount」 ⓒThe Sistine Chapel |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 말씀의 신학적 의미는 성서 전체가 그 위에 놓여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큽니다.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외아들로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셨고 지금은 그의 품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요한복음 1장 14절과 18절은 예수의 시작과 현재를 요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한이 16-17절에서 말하는 것은 그 사이 시간에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말씀으로 육신이 된 예수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했습니다(14절). 다함이 없는 그의 충만함은 그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는 근원입니다. ‘은총 위에 은총’을 우리는 그에게서 받았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위에’라는 말이 어떻게 이해되는지요? 새번역이 ‘은총에 은총을 더하여’로 번역한 것처럼 ‘많은’ 은총을 뜻하는지요? ‘위에’나 ‘더하여’는 ‘안티(ἀντὶ[anti])’를 옮긴 것인데, 이 말은 ‘맞은 편에’, ‘반대되는’, ‘대비되는’, ‘대신에’, ‘위하여’ 등을 뜻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은총이 있는데 그 ‘맞은 편에’ 또 다른 은총이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어구는 ‘은총에 대비되는 은총’으로 옮기는 것이 오해가 없겠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두 가지 은총을 구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17절이 말해주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17절이 왜 거기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16절과 17절의 이같은 관계는 참 놀라운 결과를 낳습니다.
왜 놀랍냐고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낯설 만큼 (율)법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확인해주는 표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의 유일한 표지로 보았던 것이 사실은 매우 큰 오해였습니다. 생물학적인 할례는 마음의 할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말씀에 의한 마음의 할례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토록 (율)법을 비판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용어 사용에서 좀더 신중하고 좀더 섬세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괜한 혼선을 빚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의 이 구절들은 그러한 혼란을 제거하는데 더없이 큰 도움을 줍니다. 그는 (율)법이 모세를 통해(διὰ[dia])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수동태 문장의 생략된 주어는 하나님을 우선 생각해야 하겠지만, 육신이 되신 말씀이 그 주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16절에 비춰 17절을 읽으면, ‘은총에 대비되는 은총’에서 앞의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뒤의) 은총은 율법을 주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은총입니다. (율)법 수여를 은총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바울의 영향 때문에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교회에게는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출애굽기 19장의 장면을 생각하면 그것은 은총이었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집트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들었으나 그때를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 의식을 행하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의 장자들을 치셨기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떠나라고 해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반강제로 쫓겨나다시피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시내산에 도착하기까지 이스라엘은 몇 차례 위기를 만났고, 그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집트에서 사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모로 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엔 또는 그렇다고 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렇게 형편 없는 자들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는 것이 보통 생각으로는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보잘 것 없고 하나님 편에서 아무 이익도 안되는 저 무리의 하나님이 되고자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은총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격이 안되는 자를 백성으로 삼고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겠다는 것은 은총 이외의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은총입니다.
물론 그 선택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은 이스라엘을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을 주신 것도 주신 목적도 모두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법을 담당한 세력들은 그 법을 그 법정신에 따라 지키지 못했고 자신들의 특권을 견고하게 하는데만 이용했기 때문에 그 은총은 이스라엘에게 은총이 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말씀을 지키지 못하니 껍데기인 할례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되었습니다(요1,5). 이것이 비단 스불론과 납달리만의 상황이었을까요(마 4,15-16)? 아닙니다. 온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효력이 다한 것일까요?
(율)법은 은총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폐기되거나 대체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선언하신 대로 (율)법은 다만 완성될 뿐입니다(마 5,17-20). 예수께서 (율)법 완성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입니다.
(율)법 수여의 은총에 대비되는 은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dia) 생겨난 은총과 진리입니다. (율)법의 경우에도 모세를 ‘통해’라고 했지만, 결합된 동사의 차이는 ‘통해’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모세는 매개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은총을 설명하며 단순히 진리라 하지 않고 그와 함께 은총이란 말을 한번 더 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앞에서 예수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 했고, 그 충만함에서 우리가 모두 이전의 은총에 대비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은총과 진리를 함께 씀으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은 것은 그의 충만함, 그 전체였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받은 것과 예수에게서 그의 은총과 진리를 받은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런지요? 진리가 말씀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양자를 구별짓는 것은 은총뿐입니다. 예수에게서 나타난 그 은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요 14,6을 참조해서 말한다면 예수께서 진리를 따라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로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 사건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에 대비되는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따라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충만함을 누리는 우리의 일상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그의 은총과 진리가 드러나게 되기를 빕니다. 힘겹고 고된 우리의 삶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평화를 얻고 그의 충만함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빕니다. 죽음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신 그의 은총 가운데 우리의 삶이 의미있고 보람있게 펼쳐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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