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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소수자를 위한 피난처이여야소수자의 거룩함(聖)과 본분(性), 그리고 세상의 깨어남(誠) ②
이은선 | 승인 2017.11.23 01:26

이은선(세종대 교수, NCCK 화해와통일위원회 위원)

5. 소수자의 고독과 저항

이렇게 소수자의 일은 자신의 시대와 반목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저항하면서 당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다름’과 ‘새로움’을 찾는 일이므로 이 일은 그것을 맡은 자들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수자는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묻고 의심하고,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든 ‘동화’(assimilation)시키려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차별하고, 게토에 몰아넣고,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로 하여금 다시 자신의 존재성과 정체성에 대해서 밝히라고(coming out) 추궁한다.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때까지 게토에 몰려있던 유대인들에게 유럽사회의 시민으로 살 권리를 줄 테니 대신 ‘동화’하고, 기독교식 세례를 받고, 보편적인 유럽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라고 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따랐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소수자로 남아있는 일은 ‘우산도 없는 가운데 내리붓는 폭풍우 아래서 사는 삶’이고, ‘자신의 존재를 항상 반복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살아야 하는 매우 고달픈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바로 주변에서 같은 역사적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거해야 하므로 그러한 소수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개방하기 어렵고, 대신 자기 안에 갇혀 지내는 매우 “혐오”스럽고, “너무 힘겹고”, “역겨운” 삶을 살아간다.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20세기 서구 전체주의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그 한 뿌리를 ‘반(反)유대주의’(antisemitism)에서 본 한나 아렌트는 18세기 베를린에서 그러한 소수자의 삶을 살았던 한 유대인 여성 라헬 파른하겐의 내면을 절실하게 그려낸다. 거기서 라헬은 자신의 유대인성으로 인해서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무시당하지 않고 차별을 받지 않으려고 항상 ‘특별한’ 사람이 되라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고투하고 “비극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서도 죄책감과 더불어 항상 따라다니는 열등감의 절망 속에서 깨닫게 되기를, 자신도 한 때 그렇게 원했지만, 만약 유대인 소수자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동화하라는 그 시대의 요구를 자신이 수용한다면, 그것은 “그와 더불어 그 시대가 유대인들에게 (불의하게) 가했던 증오도 함께 수용해야 하는 일”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끝까지 유대인과 국외자(페리아)으로 남았고, 그러나 이번에는 ‘의식적인 국외자’(conscious pariah)로, 즉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결정한 소수자로 남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6. 소수자의 뛰어난 감수성과 보편화의 능력

그러한 소수자와 페리아들은 그렇지만 그들 스스로가 삶에서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닌 것’을 증명해야 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인위적인 것이 되는’ 경험을 수없이 하면서 “악마적인 딜레마”를 견디며 살아왔기 때문에 거기서 “본능적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위엄(권리)을 발견”하는 일에 뛰어난 감수성을 보인다. 앞에서 성막을 지키는 일이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넘어서 그 형상 너머에 담지된 보다 근원적인 가치와 삶의 토대를 보는 일이라고 한 것처럼 소수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와 구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열정적인 이해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형상을 넘어서 보다 더 큰 차원에서 다른 것들을 포괄하는 ‘보편화’(inclination to generalize)에 대한 뜨거운 이해와 열정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수자들과 변방에 서있는 아웃사이더들의 보편화하려는 열망과 감수성은 한 주류 사회가 자신들이 이미 마련해 놓은 ‘특수’에 매여서 놓쳐버리거나, 억압하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더 깊은 차원의 삶의 진실들을 드러나게 해준다. 그것을 통해서 기성의 부패한 가치와 폭력과 비인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소수자의 시각과 열정을 귀히 여기고 경청해주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보편화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더불어 때로 너무 과해서 ‘악덕’으로까지 이야기되는 ‘감사함’과 ‘친절함’, 친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소수자는 그렇지만 그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본성을 희생함으로써만 사회적 실존을 얻을 수 있었던” 일과 주류 사회의 조건들에 의해서 모든 것을 잃어본 경험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종 자기 폐쇄 속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적으로만’ 풀려고 하고,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무능과 문제인 양 하면서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앞의 아렌트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혹독하게 겪었던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개인으로만 각자가 뛰어나게 성공해서 그 소외와 학대에서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나중에 나치 시절에 그렇게 엄청난 대량 학살까지 겪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소수자들의 정치적 무감각과 서로 연대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정치권으로 키워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소수자들에게도 이러한 지적은 매우 유의미하게 들린다.

7. 한국교회, 소수자를 위한 피난처

나는 앞으로의 새로운 시대에서의 교회는 그러한 소수자들을 모으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품을 수 있는 사회적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 <민수기>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증거궤를 맡는 레위인들에게 줄 성읍 가운데서 또 얼마를 따로 떼어서 심지어는 사람을 죽인 자라도 재판을 받기 전에 죽는 일이 없도록 ‘도피처’(민35장)를 마련해서 그들을 그곳에 피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셨다.

한민족의 오랜 역사에서도 유사한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소도’ 같은 곳이다. 소도는 거룩한 곳으로서 일종의 피난처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소수자를 품어주는 곳이 하나도 없다면, 그래서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우리 삶에서의 거룩과 존엄과 인권의 영역을 보다 더 넓게 확장시켜줄 신적 상상력의 거룩한 소수자들을 놓쳐버린다면 그것은 한 개인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큰 손실일 것이다.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염두에 두며 마련된 책 『한국적 작은교회론』(생명평화마당 엮음, 대한기독교서회, 2017)에 보면 “풀뿌리 평화공동체 형성의 걸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거기서 저자(오세욱)는 이제 한국교회의 생태계가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외적 성장이나 대형화를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오늘 한국 땅에 무수히 퍼져있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사회를 위한 건강한 ‘풀뿌리 평화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겠는가를 탐색한다. 여기서 복음과 교회의 ‘공공성’(公共性)을 특히 강조하는 저자는 마을과 지역의 작은 교회들이 일종의 담화공동체인 ‘평화서클’로 거듭날 것을 제안한다.

즉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둘러앉아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서로의 삶과 관심을 나누면서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거기서 목회자는 전통적인 형태로 권위와 언어와 영(靈)을 독점하는 대신에 서로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참다운 공동체의 관계를 이루게 하는 ‘조정자’(facilitator)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교회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불의가 만연하고 갈등과 폭력, 경쟁이 심각한데도 어느 한군데 지속적이고 안전하게 ‘정의’나 ‘평화’, ‘자기개방‘ 등의 주제에 관해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없는 가운데서 바로 마을의 작은 교회는 그러한 담화와 소통의 공간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정의에 대해서, 동성애에 대해서, 자본과 경쟁에 대해서 열려진 마음과 정신으로, 안전하게 서로를 드러내면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 그런 ‘대화와 소통의 공론장’이 되고, 공부 공동체가 되는 일을 말하며, ‘회복적 생활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곳곳에 다시 오늘의 소도를 두는 일을 말한다.

8. 우리 시대의 거룩한 소수자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처음 민수기의 이야기대로 인구수에 들지도 못하고 군대라고 하는 보편적인 호구책의 일도 갖지 못하지만 소수자로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키고 언약궤를 살피는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참으로 이스라엘 되게 하는 핵심의 역할을 한 것과 같은 우리 시대의 소수자에 누가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들은 고통에 찬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로 인해서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던, 아니면 아직 의식되지 못하고 있던 존재와 생명의 권리를 새롭게 들추어내고 복권시키는 일을 한다. 가장 먼저는 아직도 남북 분단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서 다시 민족상잔의 큰 위기 앞에 놓여있는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평화와 통일의 사람들이 생각난다.

여기에 더해서 지금까지의 장구한 인간 성 문화의 습성에 도전하면서 가족과 친밀의 새로운 길을 열려는 성소수자들이 있다. 또한 수백만의 생명을 집단 폐사시키는 일도 서슴없이 하면서 기존의 먹거리 생산을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밥상 산업에 반대하는 사람들, 지구상 생명 전체를 무화시킬 수 있는 핵무기와 핵발전에 no라는 선언으로 길고 위험한 싸움을 시작한 대안에너지 운동가들도 있다.

더불어 지금 학교와 교육으로 인해서 큰 고통 중에 있는 자라나는 세대들을 해방시키려 몸을 던지는 사람들, 종교 국적의 다원화를 이루고 지금까지의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획기적으로 푸는 일을 통해서 우리 시대 인류 문화의 수치인 세계 난민 문제, 이주민 문제와 분노하며 씨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 모두는 바로 하나님의 성막을 책임 맡은 거룩한 소수자들이다. 그래서 이 소수자들의 음성과 상상에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 삶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적 소수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은데, 즉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실상, 모든 것은 충분히 좋다. 이것이 삶의 강력한 파산으로부터의 구출이다.” 라는 그들의 언술과 상상이다.

<참고문헌>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
NCCK 신학위원회 엮음, 『촛불 민주화 시대의 그리스도인』, 동연, 2017.
생명평화마당 엮음, 『한국적 작은교회론』, 대한기독교서회, 2017.
李信,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이은선․이경 엮음, 서울: 동연, 2011.
이은선,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3. 
한나 아렌트, 『라헬 파른하겐-어느 유대인 여성의 삶』, 김희정 옮김, 텍스트, 2013.
현장아카데미 편, 『환상과 저항의 신학: 이신(李信)의 슐리얼리즘 연구』, 동연, 2017.

이은선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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